옥상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함께 구구단을 외우던 친구가 벌떡 일어났다.
“개구리 잡으러 가자.”
구구단을 못 외우던 친구였는데 방과 후에 며칠 동안 내가 돕던 중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고마웠던지 개구리를 구워주겠다고 했다.
집 근처 웅덩이에 혼자 들어간 친구는 30분 만에 50마리가 넘는 개구리를 잡아 건졌다.
따라간 나는 개구리를 비닐봉지에 담기에도 바빴다.
친구는 집에 와서 개구리를 손질했고,나는 석쇠와 소금을 준비했다.
그날 연탄불 위에 올려 놓고 소금을 뿌려가며 먹었던 개구기 뒷다리는 평생의 추억이 됐다.
김인수(38) 씨는 경기 부천에서 이렇게 자랐다.
시골에서 자란 30대의 어린 시절이 으레 그렇듯이 자연은 커다란 장난감이었다.
토끼풀은 반지와 시계로 변신했고 나뭇가지는 훌륭한 새총이 되어주었다.
놀이도 많았다. 비사치기,망줍기,오징어놀이,개뼈다귀,자치기,연날리기,진치기 등등.
그 많던 놀이와 장난감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던전앤파이터와 숨바꼭질
지훈(12)과 성현(8) 형제가 요즘 재미를 붙인 놀이 두 가지 중 하나는 ‘던전앤파이터’다. 힘을 합쳐 몬스터(괴물)를 죽이는 온라인 게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을 물었더니 “컴퓨터 게임 중에 괴물을 잡아서 좋은 아이템을 갖게 됐을 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와 아이의 ‘추억’은 이처럼 달랐다.
다행히 형제가 재미를 붙인 또 다른 놀이는 숨바꼭질이다. 전래놀이는 그렇게 컴퓨터 게임과 경쟁하고 있었다.
지난달 30일 지훈이는 학교를 마치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집(경기 광주시 초월읍 학동리)에 왔다. 수학과 과학을 잘해 학교에서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상을 받았다고 했다.
아빠 김인수 씨와 엄마 차현주(38) 씨는 아들이 무슨 요구를 해도 들어줄 듯한 분위기였다. 지훈은 “친구들과 놀게 과자잔치를 열어 달라”고 했다.
컴퓨터 게임을 실컷 하겠다고 해도 받아들일 상황인데 의외의 선택이었다. “컴퓨터 게임은 1시간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서요.”
지훈의 집에 놀러 온 동네친구 현철(12)이가 거들었다. “컴퓨터는 금방 질려서 별로예요.” 전래놀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였다.
○전래놀이 전수자는 아빠
두 아들의 친구인 박수인 권현철 고영경(12)과 허주현 이은기(8)에게 김 씨가 비사치기를 제안했다. 김 씨는 인터넷 카페 ‘준비됐나요?’의 회원이다. 아이들과 노는 데 관심이 많은 아빠들이 정보 교환 등을 목적으로 만든 모임이다.
아이들은 모두 처음 해보는 놀이였다. 돌멩이를 발등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걸었고, 배 위에 얹어서는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편을 나눈 게임에서 서로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웃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얼굴에서는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듯 흐뭇한 웃음이 묻어났다.
한창 흥이 나자 자치기 놀이가 놀이판에 가세했다.
“자치기 세트를 만들어줬더니 2시간을 넘게 가지고 놀더군요. 좀 더 일찍 만들어 줄 걸 그랬어요.” 김 씨의 말이다.
망 줍기 놀이에는 엄마가 나섰다. 놀이 방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전자 물로 그려놓은 칸으로 돌멩이를 던지고 한발 혹은 두발로 껑충껑충 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이전리 율림마을에서 전래놀이체험 공방을 운영 중인 이철수 씨는 “최근 들어 놀이체험 교육에 아빠들의 참여가 늘고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엄마들만 나설 때보다 전래놀이가 더 다양하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래놀이는 유용하다
김 씨는 아이들의 컴퓨터 게임을 무조건 막지는 않는다. 전래놀이는 선택의 폭을 넓혀 주는 또 다른 놀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전래놀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래놀이의 유용함은 여전하다.
저서 ‘우리놀이 백가지’(현암사)에서 추억의 장난감을 일일이 재현한 최재용(44) 씨는 “나무 작대기 하나를 총으로도, 또 칼로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전래놀이”라며 “놀이 방식이 제한된 요즘 장난감보다 창의성을 발휘하기가 훨씬 더 좋다”고 말했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미술학원인 ‘천개의 눈 미술연구소’를 운영 중인 최 씨는 요즘도 아이들과 함께 전통 장난감을 만든다.
‘전래놀이 101가지’(사계절)를 쓴 이상호(충주 칠금초 교사) 씨는 “밀고 당기고 치고 도망 다니면서 아이들의 몸은 골고루 발달한다”며 “놀이 규칙을 지키면서 사회성도 기른다”고 말했다.
○놀이에 숨은 재미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교육학자인 그랜빌 홀은 ‘반복 이론’을 주창했다. 진화의 과정에서 사라진 원시시대 조상들의 관심사나 일이 아이들의 놀이에서 재현된다는 이론이다.
인종과 종족의 구분 없이 모든 아이들이 물놀이와 나무 오르기, 쫓고 쫓기는 술래잡기, 숨고 찾는 활동, 여럿이 어울려 하는 사냥과 고기잡이 놀이 등을 좋아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 온라인게임에서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는 재미와 숨바꼭질에서 얻는 쾌감도 인류 공통의 유전자(DNA) 때문일지 모른다. 이날 비사치기를 한 아이들은 이런 재미를 발견했을까. 대답은 김 씨의 둘째 아들 성현이의 행동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전래놀이 체험을 끝낸 성현이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기자가 갖고 간 ‘전래놀이 101가지’ 책을 발견했다. 보물이라도 찾은 듯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는 그 때 튀어나왔다.
“아저씨, 이 책 빌려주면 안 돼요?”
그 눈빛에는 새로운 놀이에 대한 욕구가 가득했다.
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어린 시절 기억 따라 척척 아빠 손은 마술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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