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봄날이 아프다는 B에게
얼마 전 새 회사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책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친구가 암 투병 중이에요. 힘내라고 써 주세요. 순간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솔직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 상황에서 책이 무슨 도움이 될까’였지. 그래서였을까. 상투적인 문장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당황하여 맞춤법까지 틀리게 쓰고 말았어. 나는 책의 치유와 위로를 믿지 않는 걸까. 그건 아닌데 말이야.
봄을 많이 타는 나는 봄날이면 자주 우울했고, 그래서 특히 봄에 많은 책을 샀지. 그뿐인가. 젊은 날 실연을 당하면 으레 진지하고 어려운 책을 읽기 시작해서 친구들에게 ‘아픈 만큼 유식해진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어. 한때 나는 사는 일이 바쁘고 고단해서 책을 잊고 지냈었지. 30대의 고독 한가운데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손을 내밀었을 때 책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몸을 열어 보이며 말했어. 이것 봐, 너 혼자만 고독한 게 아니야. 공감이 가는 책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같았고 날카롭게 깨우쳐 주는 책은 꾸짖는 부모 같더라. 다감하고 조근조근 재미있는 책 속에는 현실에는 존재하기 힘든 변함없는 애인의 모습도 보였어.
어제 만났던 너의 쓸쓸한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말했어. 꽃이 다 져서 다행이야. 그래도 남은 봄날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그렇지만 그런 너에게 책을 읽으면서 모든 걸 잊어보라고 말할 수는 없었어.
30대에는 힘들 때마다 ‘장자’를 읽었어. 내가 붙들고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 아주 조그맣게 보이더라. 인생의 규모에 대한 감각을 바꾼다고나 할까. 어떤 구절은 우리 삶을 파고들어 해석해 주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나를 멀고 먼 강가와 같은 존재의 근원으로 데려가 평정심을 갖게 만드는 게 좋았어.
40대 때 나는 그 어느 시절보다 변덕이 심하고 쉽게 자신감을 잃곤 했어. 어떤 때는 재미있는 소설로 애써 기분을 좋게 만들어 기운을 차려야 했고, 또 어떤 때는 고통을 통과해 가는 절박한 산문에서 위로를 얻었지.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문학동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 하나야. 가아프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야유를 퍼부으니 내 속에 있던 욕지기가 삭았다고나 할까.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도 킬킬거리며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인데, 애팔래치아 등반이라는 모험에 동참하면서 그 역시 다른 높이에서 삶을 보게 만드는 기회가 되어 주었던 것 같아. 혹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줄리안 반즈의 ‘내 말 좀 들어봐’(열린책들) 같은 소설은 어떨까. 사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겨우 이런 건데 내가 목매달고 있단 말이야? 이제부터는 사랑이라면 좀 즐겁게 해야겠군. 중얼거리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는 어떤 쪽이니? 문제를 정면대결로 풀어서 뚫고 나가는 타입인지, 아니면 문제를 캐내서 크게 만들기보다 덮어버린 채 그냥 넘어가는 타입인지. 만약 네가 첫 번째라면 서경식의 미술 에세이 ‘청춘의 사신’(창비)을 권하고 싶다. 군사정권 때 간첩혐의를 뒤집어쓰고 20년여를 감옥에서 보낸 서승과 서준식의 동생인 그는 예술이 ‘숨 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이었다고 고백하지. 20세기라는 악몽을 온몸으로 뚫고 나간 화가들의 모습에서 너는 비극을 넘어가는 청춘의 힘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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