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펜타곤 페이퍼’ 엘스버그 무죄

  • 입력 2007년 5월 1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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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한테는 그저 어렵고 딱딱한 공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국민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어요. 정부를 신뢰해선 안 되고, 정부의 말을 믿어서도 안 되고, 정부의 판단에 의존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위신은 이제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1971년 6월, 해리 홀드먼 당시 백악관 수석보좌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이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국방부의 기밀문서가 언론에 유출돼 큰 파장을 일으킨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일명 ‘펜타곤(미 국방부) 페이퍼’라 불리는 이 보고서는 7000쪽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랫동안 전쟁 기회를 엿본 미국이 베트남을 선제공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을 전쟁 도발 국가로 알고 있었던 미국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에게 전쟁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했고, 그중 많은 부분은 거짓말이었다. 그해 여름, 미국 사회는 마치 벌집을 들쑤신 듯했다.

닉슨 행정부는 즉각 ‘익명의 제보자’ 색출에 나섰다. 펜타곤 페이퍼는 10여 부밖에 인쇄되지 않았을 정도로 극비 중의 극비 문서였기 때문에 이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니얼 엘스버그. 전직 해군 장교로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밑에서 이 보고서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원래 베트남전쟁을 지지했던 엘스버그는 이 일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신념을 바꿨고 평소 잘 알던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보고서를 통째로 넘겨 버렸다.

엘스버그는 스파이 행위와 절도 등 12개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백악관은 그의 정신과 병원 진료 기록을 빼내는가 하면 “엘스버그는 동성애자”라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등 등 돌린 여론을 만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이 같은 악의적인 공작은 오히려 엘스버그의 정당성만 높여 줬다. 법원은 1973년 5월 11일 그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 후 정치평론가와 반전(反戰) 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해 온 엘스버그는 최근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역사는 이 전쟁을 미국사의 가장 비참한 실수로 기록할 것이다. 양심적인 미국인들이 과거 내가 한 일을 다시 해 주기 바란다.”

과연 부시를 괴롭힐 ‘제2의 펜타곤 페이퍼’는 있는 걸까.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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