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서예의 거목으로 손꼽히는 동강 조수호(83·사진) 선생은 팔십 평생의 깨달음 중 하나를 ‘흑백락’으로 요약했다. 이리저리 갈라져서 고통 받는 한국 사회에 던지고 싶은 화두라고도 했다. 서예를 ‘접(接)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그는 “인간과 역사는 접을 통해 이뤄진다”며 “우리도 아름답게 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서예 인생을 조망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서예와 문인화, 최근의 실험작 등 194점을 선보인다. 전시장에는 ‘팔십 청년’으로 불리는 그의 붓기운이 가득하다.
전시는 20여 년 만이다. 그는 1990년 서울교대에서 퇴임한 뒤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동강은 “예술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독자적 세계가 벽에 부닥쳤다”며 “하면 할수록 부끄러움이 가슴 깊은 데서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번에 내세우는 작품 중 하나는 ‘묵조(墨調)’ 시리즈. 서예의 현대성, 즉 21세기 서예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해 온 결실이다. 작품에선 문자가 해체되고 남은 선(線)들이 일필휘지의 기운을 담고 날렵하게 움직인다. 그 선들은 동양적 미의식을 드러내며 추상의 형상을 이룬다. 그는 “우연의 효과가 아니라 오랜 고통을 거쳐 규범의 엄격함을 ‘드디어’ 넘어서는 세계이며 이것이 서예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에서 공부한 뒤 서예의 길로 들어섰다. 서예와 사군자에서 만점을 받은 일은 유명하다. 그는 “우리 것을 알기 위해 서구 가치 철학을 공부하려고 서양미술을 택했는데 스승들 덕분에 서예의 정맥을 좇아 정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장엔 젊은이들도 많다. 그는 “한글 세대가 한두 시간씩 전시를 보고 가는데 얼마나 작품을 이해할지 모르겠다”며 “전시를 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뭔지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시는 27일까지. 학생 2000원, 어른 3000원. 02-580-1284
허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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