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90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초연

  • 입력 2007년 5월 17일 03시 00분


“내가 만약 죽어 천국에 갈 수 있다 해도 그곳에 로라가 없다면 가지 않겠노라∼.”

1890년 5월 17일 로마의 콘스탄치 극장에서는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초연됐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골의 군인’이란 뜻. 조용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난 사랑, 배신, 재회, 치정, 결투, 사망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사랑을 사실적으로 그린 오페라다.

오페라의 상연시간은 비록 70분 남짓이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시칠리아인의 사랑과 열정과 피가 들끓는다. 처음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와 같은 조용한 합창으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음악은 뒤로 갈수록 격정으로 치닫는다. 오페라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파국을 향해 휘몰아치면서 보는 이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26세의 시골 음악교사였던 작곡가 마스카니는 이탈리아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초연한 바로 다음 날부터 유명 인사가 됐다. 이 오페라는 당시 이탈리아 악보 출판사인 손초뇨사가 주최한 단막 오페라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오페라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로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의 효시가 된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1607년 최초로 악보로 기록된 오페라인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이후 오페라는 신화적인 인물이나 전설 속의 영웅, 귀족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죽기 바로 직전까지 고음의 아리아를 뽑아내는 등 과장된 음악표현이 주류였다.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로 대표되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에서 영향을 받은 베리스모 오페라의 무대는 마을의 시장바닥이나 술집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순수한 사랑보다는 정염에 타오르는 불륜의 애욕을 주로 그렸다. 당시 바그너의 악극이 신의 절대적 미덕과 숭고한 희생을 강요했다면, 베리스모 오페라는 나쁘면 나쁜 대로, 악하면 악한 대로 있는 그대로 인간 세상을 그리게 된 것이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온 청년이 이미 유부녀가 된 입대 전 애인과 다시 관계를 맺다가 그녀의 남편과 결투한 끝에 죽는다는 줄거리다.

베리스모 오페라는 이후 20년간 오페라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푸치니의 ‘외투’ ‘라보엠’ 등 베리스모의 영향을 받은 걸작 오페라가 뒤를 이었다. 오늘날 오페라에 아름답지만 ‘19세 이하 불가’ 부분이 많아진 것도 그 영향이 아닌가 싶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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