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답사기 30선]<30>조선통신사 옛 길을 따라서

  • 입력 2007년 5월 17일 03시 00분


《아들 쇼노 신주로 씨는 축제와는 인연을 끊고 가업을 잇는 데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읍장이 찾아와 그에게 말했다. “재산만 이어받지 말고, 아무쪼록 아버지가 시작한 조선통신사의 일도 계승해 달라.” 쇼노 씨는 조선통신사 일을 이어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구자 6명이 통신사의 역사와 발자국을 따라가며 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옛 문헌상 통신사 여정을 답사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늘날 살아 숨쉬는 통신사 행사에 함께 참여하고 그 속에서 일본 주민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쓴 21세기 민간통신사의 기록이다. 덕분에 두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교류해야 할 것인지 단초를 열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

임진왜란 동안 수많은 백성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름도 적국의 정세를 살핀다는 뜻의 탐적사(探賊使)였다. 그러나 조정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조선과 일본이 함께 살아남는 길은 신의(信義)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사신의 이름을 통신사로 바꿨다.

일본 막부에서는 쇼군이 즉위하면 조선에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며 조선에서는 시인, 화가, 음악가를 비롯해 씨름꾼, 바둑 두는 기객(碁客)에서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馬上才)까지 이르는 열댓 가지의 예능보유자들을 사신과 함께 파견했다. 중국과 외교가 끊어진 일본은 조선을 통해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왜구가 수백 번이나 침입해 편안한 해가 없었지만 통신사가 파견된 200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는 모처럼 전쟁이 없었다.

1811년 마지막 통신사 김이교가 쓰시마 섬까지만 갔다가 돌아온 뒤 두 나라의 공식적인 외교는 끊어지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군사강국으로 발전한 일본은 훗날 조선을 침략했다. 우리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뒤에도 통신사 이야기는 한국과 일본 모두 서로 잊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연구자인 신기수 선생은 1980년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쓰시마에 살던 옛날 사람들이 한일 교류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니,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쓰시마의 쇼노 고자부로 씨는 8월의 이즈하라 항구 축제의 메인이벤트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재현했다. 당시 쓰시마 주민 가운데는 조선 옷을 입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쇼노 씨의 아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타계 후 읍장의 간곡한 설명을 들은 아들은 두 나라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마침내 이해하고 통신사 행렬의 재현을 이어받았다.

2002년부터는 한국의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가 해마다 사신과 취타대를 보내 쓰시마의 통신사 행렬 재현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사진과 옛 그림이 많이 실려 있어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좋다. 이 책은 쓰시마 섬에서 우시마 섬까지 뱃길을 따라 통신사의 문화를 찾아냈는데 오사카에서 에도(도쿄)까지의 육로 이야기가 나올 날이 기다려진다.

허경진 연세대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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