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광주 서구 치평동 5·18자유공원 내 상무대 영창.
영창 안을 둘러보던 이경희(48·여) 씨와 김복희(46·여) 씨는 27년 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붙잡힌 시민들이 갇혀 조사를 받던 곳.
쇠창살을 만지던 이 씨는 “공포에 질려 머리에 손을 올리고 오리걸음으로 영창 안으로 들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7년 전 상무대가 옮겨간 뒤 복원된 영창에 처음 와 본 김 씨는 “모진 구타로 하루 종일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라며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무력으로 진압되던 5월 27일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던 ‘여성 투사’였다.
전남 목포에서 전문대를 다니다 휴학한 이 씨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금남로 참상을 보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민 수십 명이 계엄군의 총탄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차를 타고 다니면서 헌혈 방송을 시작했죠.”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던 27일 새벽 이 씨는 거리로 나섰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애절한 목소리는 계엄군의 탱크 소리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도청에서 300여 m 떨어진 적십자병원 앞에서 붙잡힌 이 씨는 군사법정에서 내란혐의 등으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광주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157일 만에 형 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김 씨는 “그때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평생을 부끄럽게 살았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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