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더미어 호수를 비롯한 이 지역은 영국인들이 휴양지로 많이 찾는 곳. 베아트릭스 포터(1866∼1943)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런던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난 포터는 이곳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왕복 8차로의 도로가 2차로로까지 줄어들더니 잔잔한 호수와 푸른 숲, 철 따라 피는 꽃과 평화롭게 풀을 뜯는 양, 그리고 옛 모습을 간직한 나지막한 집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피터 래빗이나 벤자민 바니, 다람쥐 너킨이나 개구리 제러미 피셔, 귀여운 오리 제미마 퍼들덕, 아기고양이 톰 키튼이 길 모퉁이나 풀숲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다.
“옛날에 꼬마 토끼 네 마리가 있었습니다. 토끼들의 이름은 플롭시 몹시 코튼테일 그리고 피터였어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 피터는 맥그리거 씨네 정원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달려갔다가 파란색 윗도리를 벗어 버리고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
포터가 앓고 있던 다섯 살짜리 노엘 무어에게 편지로 써 보낸 이 이야기는 프레드릭 워런사에서 출간되자 폭발적 인기를 끈다. 그는 더 많은 동물 이야기를 써 모두 23권의 그림책을 출간한다.
포터는 어린시절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곤 했다.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앤 스티븐슨 홉스는 “포터는 동식물의 각기 다른 개성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과 본능까지 이해했다”며 “동식물 하나하나에 고유성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내친 김에 윈더미어의 보네스에서 차를 페리에 싣고 호수를 건넌다. 3파운드(약 6000원)를 내면 반대편 소리 나루터까지 건너다 주는데 10분이 채 안 걸린다. 다시 나루터에서 포터가 살았던 힐톱까지 2마일. 완만한 오르막길에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때와 변함없는 자연경관을 둘러보면서 포터가 걷던 그 길을 걷는 맛이 꽤 괜찮을 것 같다. 포터는 자연보호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에 땅 500만 평을 기증해 이곳을 무분별한 개발에서 지켜 낸다.
니어소리 마을과 길을 사이에 두고 꽃과 나무에 둘러싸인 힐톱에 들어서면 내셔널트러스트에 소속된 자원봉사자가 아이들에게 ‘사무엘 위스커스 이야기’ 한 권씩을 건네준다. “이 그림책에 나온 곳을 찾아 봐.”
아기자기한 가구와 장식품으로 가득한 방들을 둘러보며 아이들은 눈을 반짝인다. 2층 작은 방에서 한 여자아이가 34쪽을 펼쳐 보이며 창문 밖을 가리킨다. “굴뚝과 꽃나무 뒤로 구불구불하게 나 있는 시골길이 똑같아.”
힐톱은 포터가 1905년 책을 팔아 모은 돈으로 산 농장이다. 그해 워런사의 편집자인 노먼 워런은 포터에게 청혼하지만 한 달 뒤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여기서 2마일을 더 달리면 포터의 그림 원화와 자료를 모아 놓은 베아트릭스 포터 갤러리가 있는 호크스헤드에 닿는다. 포터는 마흔일곱 살에 자신의 변호사였던 윌리엄 힐리스와 결혼했는데 갤러리는 힐리스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윈더미어의 보네스 ‘베아트릭스 포터의 환상적인 세계’ 전시관 바로 옆 영화관에서는 포터와 노먼 워런의 사랑을 그린 르네 젤위거 주연의 영화 ‘미스 포터’가 상영되고 있었다.
글·사진(윈더미어)=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 찾아가는 길
잉글랜드 북서부 호수지방의 중심 윈더미어는 런던이나 히스로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걸린다. 런던 유스턴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4시간 걸린다. 윈더미어 초입부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돼 있을 만큼 빼어난 경관에 넋을 잃게 된다. 인근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생가 도브 코티지가 있는 그라스미어와 비평가 존 러스킨의 저택과 박물관이 있는 코니스턴도 가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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