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다시 보는 국수전 명승부… 전대미문의 사제도전기

  • 입력 2007년 5월 28일 03시 05분


1984년 조훈현 9단이 아홉 살의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바둑계가 깜짝 놀랐다. 전성기를 달리는 프로 기사가 후진 양성에 나선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둑계는 “조 국수가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았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조 9단은 멀리 내다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바둑계는 치열한 국제전이 전개될 것이고 그때는 혼자 힘으로 안 된다. 젊은 후계자를 키워 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확한 예단(豫斷)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창호가 이렇게 빨리 국수의 성(城)을 방문하리라고는 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15세의 도전자, 한솥밥을 먹고 한집에서 기거하며 가르치는 제자를 도전자로 맞는 스승의 심사는 제자보다 착잡할 수밖에 없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제대결. 그 어떤 분야에서 스승과 제자가 사생결단의 승부를 다투는가. 그것도 10년씩이나.

스승이 모차르트처럼 즉흥적이고 반짝반짝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면 제자는 베토벤처럼 진중하고 퇴고(推敲)를 거듭하는 천재성을 지녔다. 스승의 바둑은 화사하고 날카롭고 빨랐고 제자는 어둡고 묵직하고 느렸다.

비수처럼 파고든 흑 33의 급소 일격에 백 34로 째고 나와 38까지 실리를 챙기는 것은 아마추어 같은 발상이라 모두 아연실색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둔도(鈍刀)의 전형이다. 이에 흑 39, 스승의 감각은 봄날 햇살처럼 눈부시다. 무심결에 참고도처럼 응하기 쉬운데 이는 백 4의 삭감이 안성맞춤이다.

백 40으로 뛰어들면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흑 51로 말뚝을 박아 50집의 대궐을 지은 스승은 느긋하게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라이터를 켠다. 장미 담배. 하지만 장미의 웃음 뒤에는 가시가 있다. 백 52가 또 한번 검토실을 경악케 한다.

해설=김승준 9단·글=정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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