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와 수녀… 오월에 만나 오월에 헤어지다

  • 입력 2007년 5월 31일 03시 00분


고인이 된 피천득 선생과 30여 년간 인연을 쌓아 온 이해인 수녀. 이 수녀가 젊었을 때 피 선생 자택 서가에서 찍은 사진(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인이 된 피천득 선생과 30여 년간 인연을 쌓아 온 이해인 수녀. 이 수녀가 젊었을 때 피 선생 자택 서가에서 찍은 사진(왼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 피천득 선생-이해인 수녀 ‘30년 인연’

《너는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가난도 고독도 그 어떤 눈길도

너는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조그마한 안정을 얻기 위하여

견디어 온 모든 타협을

고요히 누워서 네가 지금 가는 곳에는

너같이 순한 사람들과

이제는 순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잠들어 있다.

29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수필가 금아 피천득 선생의 장례식에서 이해인 수녀가 이런 조시(弔詩)를 낭독했다. 자작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금아 선생이 10년 전 발간한 시집 ‘꽃씨와 도둑’을 통해 선을 뵌 ‘너는 이제’라는 시였다. 이해인 수녀는 당시 이 시를 읽고 “당신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시는구나” 하고 가슴에 새겨두었다.》

노수필가와 수녀. 두 사람의 관계는 이처럼 세밀하고 오밀조밀했다. 위스키 한 방울 넣은 커피, 장미꽃과 엽서, 클래식 음악과 로버트 프로스트, 르누아르….

두 사람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일락 향기가 물씬 흐르던 5월 홍윤숙 시인과 함께 이해인 수녀가 망원동 자택으로 피 선생을 뵈러 갔을 때였다. 피 선생은 60대, 이해인 수녀는 30을 갓 넘긴 나이였다.

“선생님은 생(生)과 사(死)마저도 초탈해 버린 듯한 수사(修士)의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어요. 아니 선생님의 글처럼 정갈하고 티끌 하나 없이 잘 정제된 수필이셨습니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마루, 서재라 하기엔 너무나 작은 선생님 방의 낡은 책상과 의자, 오래된 영문 시집들이 꽂혀 있는 서가….” 이해인 수녀의 회고다.

피 선생은 유난히 ‘오월’을 사랑했다. 그는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라고 노래했다. 고인에게 이해인 수녀는 ‘오월’이었다. 그를 ‘오월같이 정다우며 글 또한 신록처럼 맑고 따뜻하다’고 예찬했다.

이해인 수녀는 ‘금아 선생의 여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금아 선생님이 아끼는 또 다른 한 여인을 여기서 빠뜨릴 수 없다.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늘 상대편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 여인은 구도(求道)의 길에서 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는 수녀이다.’(심명호, ‘피천득의 여인들’·1997년)

이해인 수녀에 대한 피 선생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안쓰러움과 애틋함, 싱그러움, 그리고 일찍 떠나보낸 모친에 대한 감정이입 등이 교차하고 있는 듯했다.

10세 언저리에 부모를 모두 잃은 피 선생의 사모곡(思母曲)은 각별하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딸)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느님 앞에서 서원한 젊은 수녀에 대한 애처로움과 보호본능, 엄마 없이 자란 자신이 기대고 싶은 넉넉한 성모(聖母)의 품을 이해인 수녀를 통해 구현해 보고자 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가페’와 ‘필로스’를 결합한 듯한 두 사람의 관계는 그래서 더 은은하고 오래 묵었다. 이들의 ‘인연’은 이제 천상(天上)으로 이어지고 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