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지린(吉林) 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 2007년 3,4월호는 뤄양(洛陽)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이 공동으로 집필한 '뤄양, 루산(魯山),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唐代)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둥 교수 등은 논문에서 그동안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인의 묘지를 분석하면서 "지난해 뤄양의 한 시장에 시안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석이 나타났다"며 출토사실을 처음밝혔다. 저자는 그러나 출토 시기와 지점은 밝히지 않았다.
예식진의 묘지석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 장군, 그의 아들 흑치준, 난원경, 노정빈으로도 알려진 낙사계에 이어 백제 유민의 것으로는 6번째다.
668년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석은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과 남산, 남생의 아들 헌성, 헌성의 손자 비 등의 것이 발굴됐다.
가로 세로 57㎝, 두께 15㎝인 묘지석 뚜껑은 아래쪽에 전서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寔進墓誌之銘)'이라는 글자가 4줄로 새겨져 있다.
가로 세로 58.5㎝, 두께 13㎝인 묘지석엔 18줄에 걸쳐 288자가 해서로 새겨져 있다. 4개 측면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음각돼 있다.
묘지석을 분석한 두 저자에 따르면 백제 고위무관 출신인 예식진은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 조정에 발탁돼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다. 저자들은 예식진이 의자왕과 왕족 대신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항복의 예를 갖추고 관직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예식진은 당나라로 끌려간 지 12년 만인 672년 산둥 성 옌타이에서 58세로 사망했다고 묘지에 기록돼 있으나 왜 그가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는 언급이 없다.
두 저자는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과 언어가 통하는 그를 임시차사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당나라 조정은 예식진의 사망보고를 받은 뒤 조서를 내려 유해를 시안으로 운구한 뒤 당나라 고관대작들의 무덤인 고양원에 장사함으로써 예우를 했다고 두 저자는 설명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의 삶을 연구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하종대특파원 orionha@donga.com
20051012|윤완준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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