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 주세요, 그들은 세상의 속죄양입니다”

  • 입력 2007년 6월 7일 03시 00분


AIDS 환자 돌보는 한국가톨릭에이즈협의회 회장 김종일 신부

○ 전국 8곳 ‘감염인 쉼터’ 극비리에 운영

베드로(35) 씨는 건강해 보였다. 어림잡아 170cm대 후반의 큰 키에 짧게 깎은 머리, 탄탄한 근육. 누가 봐도 그냥 건장한 보통사람 같다. 하지만 그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감염인’이다. 해운업체에 근무하던 그가 감염 사실을 안 것은 2001년.

한국가톨릭에이즈협의회 회장인 김종일 신부(말씀의 선교 수도회·사진)의 손에 이끌려 기자와 만난 베드로 씨는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는 그런 ‘환자’가 아니었다. 재활을 꿈꾸는 감염인들끼리 모여 묵주를 만드는 작은 가내 공장을 세웠다. 지금은 성당과 선물가게 등에 납품도 하는 어엿한 사업가다.

그도 처음 감염 사실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건강검진을 한 회사 측이 ‘회사복귀명령’을 내리지 않아 자연스럽게 실업자가 됐다. 집에서 가족과 살았지만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고 나중엔 외톨이가 됐다. 어렵사리 한 친구에게 감염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친구 모임에 더는 나오지 말라”는 ‘보답’이 돌아왔다. 인간관계는 모두 단절됐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감염인들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이유는 에이즈 자체보다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해 생기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스트레스가 커지면 면역수치가 떨어지지요.” 베드로 씨는 김 신부가 운영하는 ‘감염인 쉼터’에 찾아와 같이 생활하고 대화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힐 수 있었다.

협의회가 운영하는 쉼터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원주 청주 등 전국 8곳에 퍼져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소재지는 비밀이다. 동네에 ‘쉼터’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주민들의 반대로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6년간 신학을 공부한 김 신부는 사목실습 차원에서 1년간 현지에서 마약중독자, 노숙인, 에이즈 감염인을 보살폈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 한 분이 감염인과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인간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던져버리고 가족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 이것이 바로 사람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김 신부는 신학 공부를 마친 뒤 2001년부터 미국에서 4년간 흑인 및 한인교포 사목을 했다. 그리고 2005년 귀국해 감염인들과 생활하고 있다. “‘왜 저 사람은 저런가’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 안아 주는 것이지요.”

쉼터를 운영하면서 김 신부가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와 편견. “일반인도 감염자와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목욕탕을 같이 써도 됩니다. 그런데도 감염되면 몸에 반점이 생기고 다 죽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일반인 인식 나아졌지만 갈 길 아직 멀어

최근 들어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 문제를 다룬 TV 드라마 ‘고맙습니다’, 에이즈 감염 20년 만에 유엔 고위 관료에 오른 케이트 톰슨 씨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편견의 벽이 낮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김 신부의 생각이다.

“궁극적으로는 쉼터 등은 없어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가족 안에서 사랑으로 병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한국의 에이즈 감염자는 공식적으로 4500여 명. 실제로는 1만 명이 넘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2005년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에서 이렇게 강론했다.

“감염인 한 분 한 분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분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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