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따라 세계일주]<4>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코리엔테스 거리에는 대규모 공연장과 소극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사진 제공 유경숙 씨

아르헨티나에는 관광객들이 탱고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사진 제공 유경숙 씨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로 왔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가 선보였던 짜릿한 탱고 장면을 잊지 못하는 나는 그 탱고의 본고장에 왔다는 기대로 마음이 설♬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탱고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아르헨티나 거리는 온통 예술 공연으로 가득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왜 진작 이런 풍요로운 문화자원을 알리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정도였다. (혹은 내가 무지했던 걸까) 조명의 화려함만 다를 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미의 뉴욕이요, 코리엔테스 거리(Av.Corrientes)는 남미의 브로드웨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규모 공연장과 소극장이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남미의 브로드웨이’ 코리엔테스 거리
오후 2시만 넘으면 공연 물결

이곳의 상인이나 택시운전사, 학생, 심지어 여행자들에게 “어딜 가면 좋을까”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물론 코리엔테스지”라고 대답한다. 코리엔테스에는 (작은 골목의 소극장까지 포함하면) 크고 작은 공연장만 57개, 문화센터, 박물관, 그리고 전시 갤러리만 자그마치 51개에 이른다. 여기에 영화관들도 사이사이 끼어 있다. 특히 밀라노의 스칼라좌 극장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콜론극장의 화려한 내부를 꼭 보고 오라는 지인의 충고에 따라 찾아갔으나 공사 중이어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코리엔테스거리 크고 작은 공연장만 57개… 공연 티켓값 1500원∼4만원선

코리엔테스 거리를 가로지르는 플로리다 거리는 오후 2시가 넘으면 거리 공연이 넘친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꼬마악사, 탱고 커플 등 다양한 거리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야바위꾼도 나와 행위 예술(?)을 보여 주었다.

이 거리에서도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산 마르틴극장(San Martin teatro)은 700석 이상의 극장 3개, 100석짜리 소극장 1개, 전시장 2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연극을 최우선으로 기획하고 있다는 관계자의 말에 놀랐다. 한국이라면 이렇게 좋은 위치, 좋은 시설에서는 일단 돈이 되는 뮤지컬부터 올리고 봤을 텐데. 공연시간도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주말의 경우 한국은 오후 2∼3시, 오후 6∼7시 공연 등 2회 공연이 일반적이다. 이곳에선 주말도 낮 공연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보통 오후 8시와 11시에 공연이 시작된다.

티켓값도 천차만별이어서 일반적으로 소극장 연극은 5∼15페소(1500∼3000원), 대극장 창작 공연은 35∼120페소(1만∼4만 원)로 저렴한 편이다. 수입 공연이라고 해도 200페소(8만 원)를 넘지 않았다. 시민들을 위한 크고 작은 무료 공연을 자주 올린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경제는 어려울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분명 우리보다 풍요로운 듯했고 사람들도 여유로웠다.

○60개 객석 꽉찬 소극장, 배우가 연극중 마시던 차 관객에게 나눠주며 일체감 느껴

코리엔테스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산텔모 인근 소극장에서 겪은 일은 잊을 수 없다. 무대는 두 평 남짓, 관객은 60여 명이 들어서면 만석이 될 만큼 작은 연극 전용 소극장이었다. 오후 8시가 다 됐는데도 공연을 시작할 기세가 없었다. 웬일인가 했더니 공연자가 안 왔다고 했다. 예정시간에서 20분쯤 지나자 객석 뒤편 관객 출입구에서 누군가 후닥닥 뛰어 들어와 사과를 했고, 관객들은 오히려 박수로 그에게 힘을 돋워 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공연 중 배우가 마시던 차를 관객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도자기 찻잔에 반드시 빨대로 빨아 마셔야 하는 남미 전통의 마테차였는데, 무대 위 배우가 객석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이쪽 줄과 저쪽 줄, 컵 두 개 줄 테니까 돌려 먹어요∼.”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나였지만, 여행 경력 10년에 눈치가 9단이다.

한 명, 두 명…죄다 배우가 건네 준 같은 빨대로 마테차를 먹더니 급기야 세 번째 줄에 앉은 내게 찻잔이 왔다. 순간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긴 싫어 웃으며 쭉 빨아 마셨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B형간염 면역체가 없으니 예방접종을 하라던 의사의 충고가 떠올랐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빨대 하나로 모든 관객이 차를 나눠 마셨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릴 적 시골집에 갔다가 세숫대야만 한 큰 볼에 이것저것 반찬들을 넣고 슥슥 비벼서 밥을 나눠먹던 때의 기억 같은 따뜻함이랄까. 이 공연을 위해 내가 지불한 금액은 겨우 8페소(2400원). 왠지 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방인의 외로움 달래준 탱고▼

“허리를 곧게 펴고, 에너지를 가슴에 모아 파트너를 응시하세요. 그의 볼에 이마를 대고 느끼세요! 사랑하듯이!”

그의 볼에 이마를 대고 5분을 서 있었다. 모르는 남자의 얼굴에 이마를 대고 내 몸을 기대어 의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이와의 탱고가 얼마나 생소하면서도 스릴 있는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탱고의 나라에 온 만큼 아르헨티나에 머무는 짧은 동안이라도 직접 탱고를 배워 봤다. 관광객들이 탱고를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많았다. 관광 일정에 따라 1주에 2시간 레슨부터 8시간 레슨 등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았다. 물론 영어로 진행된다.

레슨비는 2페소에서 80페소까지 다양했다. 2페소면 우리 돈으로 겨우 600원! 나는 1시간에 5페소, 우리 돈으로 시간당 1500원 정도인 레슨을 받았다.

아르헨티나에 갈 계획이 있는 여성이라면 꼭 멋진 드레스와 하이힐을 준비하길 권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탱고 선생님은 “레이디! 운동화 신고 탱고는 너무했다. 까치발 들엇!” 하더니 나를 골탕 먹이려는 듯 키 큰 남자만 파트너로 정해줬다.

원래 탱고는 유럽에서 남미로 건너온 가난한 노동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추던 슬픈 춤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라 보카(La Boca)라는 빈민촌이 탱고의 발상지라고 했다. 오후 1시 이후에는 거리에서 탱고를 추는 커플도 쉽게 볼 수 있다. 1주일 배운 탱고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탱고클럽에도 가봤다. 힙합에 더 익숙한 젊은 층보다는 중장년층이 많았다. 자정을 넘겨 오전 2시가 되어도 탱고 클럽에는 입장객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껌처럼 딱 붙어서 정열적으로 춤을 추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밝아 보였다. 탱고는 스킨십이 많아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최근 들어 심리치료용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는데 경험해 보니 효과 만점인 것 같다. 여행 중, 외로웠던 나의 마음을 탱고가 꽉 채워 줬으니 말이다.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