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7시 반 제주 한라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제주 돌문화공원. 야외 오페라 ‘백록담’ 공연이 시작되자 어스름이 밤안개가 무대를 감싸더니 이내 맑아지며 샛별이 떠올랐다. 유배도령 문길상과 제주처녀 구슬이가 애틋한 사랑의 아리아 ‘달빛보다 촛불이’를 부를 때에는 실제로 밤하늘의 무수한 별빛이 쏟아 내렸다.
이 오페라는 ‘한라산에 머리를 베고 누우면 발이 비양도까지 닿았다’고 하는 제주도의 거녀(巨女) 설화 ‘설문대 할망’을 토대로 한 작품. 백록담처럼 생긴 조그만 호수, ‘곶자왈’이라고 불리는 가시덤불 밀림, 설문대 할망의 자식들인 오백나한을 상징하는 거대한 현무암 돌덩어리…. 공연장 주변의 풍경은 작품의 배경과 꼭 맞아떨어졌다.
해발 410m의 중산간 지대에 자리한 야외공연장. 밤이 되자 두꺼운 잠바를 입고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날씨가 쌀쌀해졌다. 밤이슬에 젖은 현악기들은 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다. 주최 측이 나눠 준 비닐을 뒤집어쓰고도 오들오들 떨던 2000여 관객들은 ‘감수꽈?’ ‘그걸 어떵?’ 같은 제주 사투리로 된 노래가 나올 때마다 큰 소리로 웃었다.
“사람마다 갈 길이 다르니/그 누겐들(누구인들) 그 질(길)을 막아지커냐?(막을 것이냐)/바당(바다)으로 갈 사름(사람)/오름(산)을 2을 사름/뭍(육지)으로 갈 사름.”(설문대 할망의 아리아 ‘그 누가 길을 막는가’)
‘백록담’은 운율감 있는 제주 방언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육지 사람들은 마치 외국 오페라처럼 자막을 봐야 이해할 정도. 30여 제주민요에서 따온 ‘방아야, 방아야’ ‘탐라의 노래’ ‘이어도’ ‘이야홍타령’ 등 합창곡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노래들이다. 또 구슬이 역의 소프라노 이화영은 사회적 인습에서 떨쳐 일어나 금기된 사랑을 쟁취해 내는 강인한 제주의 여성상을 잘 표현해 냈다. 극작가 고(故) 차범석 선생이 극본을 쓰고 김정길 서울대 교수가 작곡한 ‘백록담’은 2002년 초연 이래 5년째 제주시문화예술단에 의해 공연되고 있다. 실내에서만 공연된 이 오페라가 야외에서 공연된 것은 이번이 처음.
제주시향 지휘자 이동호 씨는 “아무리 최첨단 무대 장치가 발전해도 몇 만 년 존재해 온 자연처럼 완벽할 순 없다”며 “음악홀처럼 완벽한 음향효과를 기대할 순 없었지만 한라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무대였다”고 말했다.
제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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