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다이제스트판으론 부족하다

  • 입력 2007년 6월 16일 03시 01분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생각의 탄생’이란 책을 읽었다고 해서 화제다. 창조적 상상력, 창조적 경영에 대한 이 회장의 관심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장뿐만 아니라 삼성의 많은 임직원도 이 책을 읽고 있다 한다. 책을 읽고 창조적 상상력을 키워 나간다고 하니 즐거운 소식이다.

이와 함께 일부 직원 사이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다이제스트본이 인기라는 얘기도 들린다. 시간이 부족한 샐러리맨들에게 책 내용을 요약한 다이제스트본은 반가운 대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다이제스트본을 읽는 것과 원래의 책을 읽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점이다.

책을 이렇게 분류해 보자. 발췌해서 읽어도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 요약해서 읽어도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으로 말이다. 독립된 정보나 독립된 내용의 글이 들어 있는 책은 발췌해서 읽어도 좋다. 실용적인 책은 요약해서 핵심 정보만 파악해도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요약해서 읽으면 곤란한 책이 있다. 문학 작품이 가장 대표적이다. 시와 소설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한두 대목 발췌해서 읽을 수는 있어도 요약해서 읽는 것은 그 의미와 미학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최근 들어 국내외 소설을 요약한 다이제스트본이 많이 나오고 있다. 어찌 보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두껍고 어려운 ‘카라마조프의 형제’나 ‘백치’ 등을 요약본 문고판으로 읽은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국내 장편소설의 요약본 출간이 부쩍 늘었다는 점, 동서양 고전을 요약 정리한 비슷비슷한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주범은 논술 광풍(狂風)이다. 대부분 논술용 문학 및 고전 다이제스트들이다. 이 가운데 소설이 아주 심각하다. 소설 다이제스트는 원래의 소설과 분명 다르다. 어느 소설의 다이제스트를 읽는 것은 그저 줄거리를 읽는 것이지 원래의 소설 문학을 읽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책의 주제와 줄거리, 정보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직접 읽는 그 과정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 책을 읽으면서 예상치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고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캐내 그것을 통해 깊이 있는 상상력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작가가 공들여 쓴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도 작가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다이제스트가 아니라 소설 원작을 읽어야만 이런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원작 읽기의 중요성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사고력과 상상력을 늘리기 위해 도입된 논술이 문학 작품, 동서양 고전, 기타 책들의 다이제스트를 양산해 낸다면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진정한 독서에 장애물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력 상상력 계발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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