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할머니가 넘어져도 냅다 달려가 “대장부(大丈夫)입니까(다이조부데스카)?”라고 물어 보는가? 왜 일본의 불륜 영화에서는 꼭 기차가 나오는가? 왜 일본 만화에 나오는 여자는 항상 하얀 ‘빤쓰’를 살짝 보여 주는가?
자신을 ‘국내 최초로 놀면서 석사학위를 받는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라고 소개하는 저자의 일본 분석은 이런 질문들로 시작된다. 잘 놀면서 살자는 ‘휴(休)테크’의 창시자답게 저자가 바라본 일본 문명 감상기는 그동안 무수히 쏟아져 나온 일본 관련 서적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팬티, 기차, 러브호텔, 응원 등의 가볍고도 말랑말랑한 소재들로 시작되지만 이야기를 끝낼 무렵에는 묵직한 주제를 안겨다 주는 것이 마치 헐렁한 듯 보이면서 엄청난 내공을 갖고 있는 무협영화나 만화 속 주인공 같기도 하다.
도쿄의 러브호텔 거리 견학을 마치고 카페에서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듣던 중 푸치니가 동양을 ‘멋대로’ 해석했듯이 일본 ‘멋대로’ 서양의 문화를 재구성하는 ‘옥시덴탈리즘’을 떠올리고, 일본 여자에게 쓸 작업 멘트를 작성하던 중 일본 문법에 밴 정치적 권위주의를 떠올린다. 하루 종일 자신이 요구한 정보를 찾아 헤매는 게스트하우스 직원의 과도한 ‘친절’에서 자신을 끝없이 괴롭힘으로써 상대방을 자발적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일본인의 자학적 심리전을 간파하는 등 저자의 일본 문화 분석은 가벼우면서도 무겁고,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그러나 저자가 바라보는 일본은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제목이 암시하듯 본문 곳곳에는 오히려 일본 사회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 차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닌 와세다대의 교정에서 ‘상실의 시대’를 떠올리며 20대에 사랑과 낭만을 누릴 수 없었던 한국의 386세대가 주류가 된 이 사회가 불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탄식하기도 하고, 20세기 초 개항기 재벌들의 저택으로 구성된 공원을 거닐며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로 부자가 사회에 문화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한국적 토양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경멸감이다. 저자는 일본의 ‘큰 가슴’ 이나 하얀 ‘빤쓰’ 집착증이 권위에 눌린 일본 남성들의 오르가슴 결핍증이라고 진단하면서도 만나면 정치 이야기뿐이고 학번과 나이 권력의 유무로 언어 사용 및 행동의 원리가 결정되는 한국 남자들에게 ‘제발 우린 아닌 것처럼 착각하지 말자’고 야유한다. 맹목적이긴 하지만 사무라이 정신에는 적어도 절차에 대한 신념이라도 존재하지만 우리 사회는 절차도 목표도 분명치 않은 정서적 방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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