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몰아내는 커피향

  • 입력 2007년 6월 19일 03시 02분


《대학생 박신영(23·여) 씨의 오후 일과는 학교 앞 커피전문점 ‘커피빈’에서 시작된다.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 2, 3시 박 씨는 커피빈으로 달려가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꺼내 공부한다. 머리를 식힐 때는 노트북을 꺼내 무선 인터넷에 접속해 미니홈피를 꾸미거나 친구들을 불러내 최근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이나 어제 본 드라마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면 커피 서너 잔은 기본,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일주일에 3번 이상 방문한다는 박 씨는 “답답한 도서관과 달리 탁 트인 곳에서 사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며 “과방보다 커피숍을 즐겨 찾는 같은 과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 커피숍 게릴라전… 사라져 가는 문화공간

책 향기 대신 커피 향기가 흩날리는 시대가 온 것일까. 과거 대학가의 상징이 서점이었다면 이제는 학교 앞 커피전문점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 본보가 신촌, 대학로, 신림동, 압구정동, 강남역 등 서울시내 대학가 및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번화가가 속한 7개 구(區)를 조사한 결과 커피전문점은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반면 서점, 음반점 등은 이에 밀려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폐업을 한 서점과 음반점 자리에 커피전문점이 들어서면서 기존 문화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지난달 폐업을 선언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음반점 ‘뮤직 라이브러리’는 15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압구정동 대표 음반점이었다. 현재 이곳은 새로운 커피전문점의 입주를 앞두고 공사가 한창이다. 10년 단골이었다는 직장인 김영훈(28) 씨는 “10m도 안 되는 옆 건물에 커피숍들이 늘어서 있는데 또 생긴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1988년 개점 이후 건국대를 대표하는 서점으로 알려진 광진구 화양동 ‘건대글방’은 2004년 자리를 옮겼고, 현재 그 자리에는 커피전문점 ‘엔제리너스’가 들어섰다. 공연장 ‘바탕골소극장’으로 잘 알려진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블랙박스 시어터’도 2년 전 임대료 문제로 지하 1, 2층에서 5층으로 이전했고, 현재 입구에는 커피빈이 들어섰다.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 대학 밀집 지역이 포함된 서대문구와 마포구의 경우 6월 현재 커피숍만 128개로, 64개였던 2년 전보다 2배가 늘었다. 반면 지난해 기준 이 지역 서점은 헌책방을 다 합쳐도 67개. 11개뿐인 음반점은 더 열악한 처지다.

조사 대상 7개 구 중 커피전문점이 가장 많은 구는 강남구로 커피숍만 150개가 넘고 ‘스타벅스’만 40개가 있다. 이는 오피스텔과 상권이 밀집된 중구(18개)의 2.5배 가까운 수치. 스타벅스는 1999년 이화여대 앞에 1호점을 차린 이후 8년이 지난 지금 전국적으로 203개의 체인점을 거느리고 있다.

○ 새로운 문화공간인가? 겉멋인가?

한 잔의 커피가 책, 음반 등 다른 문화적 수요를 대체한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커피 수요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독서, 인터넷, 학교 숙제, 심지어 고민 상담 등 다양한 일을 처리한다. 대학생 김혜진(23·여) 씨는 “서점이나 레코드점은 물건 구입하는 장소일 뿐 복잡하기만 하다”며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서 구입하고 이를 커피숍에서 즐긴다”고 말했다.

커피숍 증가 현상에 대해 한국서점조합연합의 이창연 회장은 “책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커피전문점이 메우고 있다”며 “이를 막기 위해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피숍에 밀리는 과거 문화공간을 살릴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부산에 위치한 서점 ‘인디고서원’을 성공 사례로 꼽는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으로 특화한 이 서점은 인문학 교수와 소설가들이 찾을 정도로 지역 명소로 꼽히고 있다.

해외에서는 서점 등이 책 파는 곳만이 아닌 ‘복합 공간’ 개념으로 변신을 꾀한다. 일본의 중고 음반 및 책 판매점인 ‘츠타야’는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놓고 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서점 ‘북비트’는 신간만 다루지 않고 라이브 무대까지 설치해 카페를 겸하고 있다.

그러나 커피 한 잔에 3000∼4000원 하는 커피전문점이 젊은이들에게는 일종의 사치 문화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문화평론가 김지룡 씨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하나의 ‘멋’이 될 정도로 미 의식이 변했다”며 “실체가 있는 문화라기보다 과거 문화를 구식으로 보는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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