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자전거가 다니는 도심의 교차로, 가로변에 늘어선 전신주, 코끼리쇼가 진행되는 서커스장, 신식 법복을 갖춰 입은 법관들이 등장하는 재판….
20세기 초 근대기 생활 모습을 담은 그림은 뜻밖에도 일반 풍속화가 아니라 ‘감로도(甘露圖)’라는 불화 중 일부다. 중생 교화를 목적으로 한 감로도는 현실의 희로애락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
그중에서도 1939년 제작된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의 감로도에는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광복 직후 그림이 친일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오해 때문에 그림 위에 흰색을 덧칠하거나 종이를 덧대는 등 수난을 겪었다. 제대로 된 연구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희정 대청호미술관 학예사가 올 3월부터 정재문화재연구소와 합동으로 적외선 촬영을 이용해 그림을 상세 분석한 결과 새로운 의견이 제시됐다. 이 불화들은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다.
장 학예사가 주목한 것은 감로도의 전쟁 장면들.
감로도는 일반적으로 전쟁 장면을 하나 정도 넣지만 흥천사 감로도에는 모두 5개나 된다. 내용도 폭격과 같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상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또 당시 조선인에게 원성이 높았던 일본식 재판이나 총독부 정경, 민간 경제 파탄의 주범이었던 전당포 모습 등 일제 강점 후 나타난 부정적 사회상들을 담고 있다. 그림을 그린 승려 남산병문이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열 인사로 분류됐다는 점도 이 그림에 담긴 비판 의식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장 학예사는 “일제강점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투영했으며 시대 비판이라는 주제가 강도 높게 전달된 그림”이라며 “독특한 화면 구성 방식이나 19세기 말 서양화법의 수용 등 불교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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