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상처입은 사람들, 그 ‘웃기는 비극’… ‘감기’

  • 입력 2007년 6월 23일 03시 01분


◇ 감기/윤성희 지음/276쪽·9800원·창비

이 소설 재미있다. 깔깔 소리가 나올 만큼 웃긴다는 게 아니다. 황당한 상황을 짐짓 쓸쓸하게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가 좋다. 이런 식이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는 집까지 걸어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턱에는 수염이 돋아나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마당에 내던지면서 말했다. 실종신고도 안 하냐? 평상에 앉아 비빔국수를 먹고 있던 식구들이 빈 그릇에 자기들이 먹던 국수를 덜어냈다. 이리 와, 국수나 먹어.”(단편 ‘무릎’에서)

집 나갔다 돌아온 주인공을 맞고도 태연하게 국수를 먹는 가족들. 시트콤에 나올 법한 상황이다. 주인공은 이렇게 ‘웃기는 비극적인’ 상황을 여러 번 겪은 터다.

새 신발을 갖고 싶어서 형들보다 더 빨리 자라겠다고 하루에 여섯 끼씩 먹다가 비만이 돼 버렸고, 교통사고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사내는 죽어 버렸지만 그는 이마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 과장된 농담처럼 보이지만 ‘웃기는 비극적인’ 인생과 닮았다.

윤성희(34) 씨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소설을 써 온 작가다. 세 번째 소설집 ‘감기’에서도 그는 문학의 큰 미덕인 위무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신음소리 대신 유머를 섞는 윤 씨의 기교는 ‘감기’에서 더욱 능란해졌다.

이를테면 2007년 이수문학상 수상작인 ‘하다 만 말’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다. 부잣집 할머니와 결혼해 인생 역전하는 게 꿈인 할아버지, 가게 세나 받아먹으며 살 팔자라던데 이것저것 사업하다가 아파트마저 날리는 아버지, 폐암 선고를 받은 할머니 앞에서 조선 중기부터 내려오던 반닫이에 불 지른 뒤 ‘진품명품’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엄마….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마음의 상처를 품고 있는 가족들은 그러나 절망하는 대신 담담하고 코믹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문체를 통해 모순과 역설을 삼켜가는 인생의 비의(秘意)를 잔잔하게 일러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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