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식사회에서 ‘자유주의적’이란 표현에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부르주아 또는 중산층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경멸의 뉘앙스가 스며 있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레이몽 부동 파리4대 교수의 이 책은 19∼20세기를 관통하는 서구지성사를 가로지르면서 왜 자유주의의 혜택을 받은 지식인 집단이 그 자유주의를 그처럼 경멸하게 됐는지를 새롭게 분석한다.
저자는 지식인을 3가지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지적 본능에 따르는 진리추구형, 둘째는 ‘신념의 윤리’에 따르는 투사형, 셋째는 TV에 자주 나오기 위해 인기몰이에 열중하는 인기형이다. 20세기 들어 대중의 등장과 함께 진리추구형보다 투사형이나 인기형의 지식인이 점점 더 많아진다. 투사형이나 인기형 지식인에겐 지식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에 대중적 호소력이 강하고 현대사회의 여러 모순을 단순 명쾌하게 풀어줄 수 있는 지식을 더 선호한다. 칸트와 애덤 스미스, 토크빌, 베버 같은 자유주의 전통의 지식인보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와 같은 ‘의혹의 스승들’이 지식시장을 장악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유주의는 세계에 대한 직관적이고 총체적 통찰을 제시하지 못한다. 소수의 지배계급과 다수의 피지배계급 간의 계급투쟁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마르크스주의나 유년시절의 정신적 체험이 어른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명쾌한 ‘설명의 도식’이 없다. 자유주의는 그저 세계에 대해 부분적 이해만 제공할 뿐이다. 진리의 세계는 오묘할지언정 단순 명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사회를 향한 저자의 신랄한 비판 역시 너무 단순 명쾌하다는 점에서 반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지식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자유주의를 너무 쉽게 비판하는 오늘날 지식인들 역시 현실 비판을 위해 진리라고 믿는 것과 너무 쉽게 타협한 것은 아닌지 뜨끔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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