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4명이 서명 ‘만인소’ 보셨나요?

  • 입력 2007년 6월 27일 05시 26분


1855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며 영남 유생 이휘병이 주동이 되어 올린 만인소. 1만94명이 서명했으며 길이가 96.5m에 이른다. 사진은 일부를 확대한 것이다. 사진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1855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며 영남 유생 이휘병이 주동이 되어 올린 만인소. 1만94명이 서명했으며 길이가 96.5m에 이른다. 사진은 일부를 확대한 것이다. 사진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조선의 정치 형태는 ‘공론(公論)정치’라고 한다. 조선 중기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며 본격화한 ‘공론정치’ 체제에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유생들은 수시로 왕에게 국정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상소를 올려 정치에 영향을 주었다.

통치자가 여론을 두려워하고 정치에 수렴했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정치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시스템이다.

만인소(萬人疏)는 이러한 조선 공론정치의 진가가 담긴 결과물이다.

상소에 1만여 명이 연대 서명을 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만인소는 조선 시대 가장 강력한 여론 전달 기구였다. 영조 대에 유생들의 상소가 너무 많아 성균관에서 걸러내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만인소만은 어디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전달됐다.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기록에 남은 만인소는 모두 7점이며 현재까지 남은 것은 3점이다. 수가 이처럼 적은 것은 만인소는 작성자 쪽에서도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인소는 당대에 정치적으로 예민한 이슈를 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주동자들은 귀양을 가기 일쑤였다. 만인소 참가 유생들은 우두머리를 선출해야 했는데 그 투표 결과는 ‘소수권점’이라 불리며 보관돼 왔다.

만인소가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792년(정조 16년) 영남 유생들이 상소한 것으로 사도세자를 복권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만인소는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비주류로 밀려난 남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열세를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성격도 있다. 만인소 7점 중 5점을 영남 유생들이 작성했다는 점이나 서인들에게 정치적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도세자 관련 내용이 2점인 것도 이런 연유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9일부터 9월 2일까지 경북 안동시 유교문화박물관에서 개관 1주년 기념 기획전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만인소’를 개최한다.

만인소 중 최다 인원인 1만94명이 서명한 길이 96.5m의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1855년)’를 비롯해 현존하는 만인소 3점과 ‘소수권점’, 조선 중기 관료인 조정이 임진왜란에 대해 남긴 ‘임란일기’ 등 희귀 자료 35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700원. 054-851-0792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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