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산문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네’ 번역문의 일부다. 누이의 상여가 떠나가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이별의 장면을 이리도 아름답게 포착할 수 있다니, 아름다워서 더욱 애잔하다.
이 번역문은 ‘태학산문선’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에 수록되어 있다. ‘태학산문선’ 첫 권이 나온 건 2000년 봄. 조선시대 한문 산문 가운데 명작들을 골라 단정한 문체로 번역한 시리즈다.
기획위원은 우리 고전문학의 매력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정민 한양대 교수와 안대회 명지대 교수. 이들의 명성에 걸맞게 이 시리즈는 한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숨은 공로자가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태학산문선’ 시리즈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종종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마다 ‘이 시리즈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태학사의 변선웅 주간. 1940년생, 예순일곱 살이다. 1968년 민중서관을 통해 출판계에 입문했으니 벌써 40년째다. 한 번 읽고 던져 버릴 책이 아니라 10년, 100년 후에 사람들이 다시 찾을 만한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1970년대 을유문화사 시절, 변 주간은 특히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국학 분야의 논문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물론 학술 논문이 지금처럼 그리 많지 않았기에 가능했지만, 하여튼 그때 공부해 둔 걸 지금까지 써 먹는 셈입니다.”
지식산업사, 범조사, 두산동아 등을 거쳐 그는 1999년 태학사로 옮겼다. 그때 나이 이미 쉰아홉 살. 그러나 고전문학 학술지 ‘계간 문헌과 해석’을 발간해 왔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한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태학산문선’을 탄생시켰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같은 ‘문화의 창’ 시리즈도 내고 있다. 지금은 중국 철학과 관련된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그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안 교수의 말이 실감날 정도다.
“젊은 사람들이 감각도 더 뛰어나고 일도 잘하는데 괜히 내가 그들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다”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변 주간. 그래도 흐르는 세월이나 나이가 그의 출판 열정만큼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필자를 만나고 기획을 하고 원고를 검토한다. 내일도 또 내일도, 책과 함께하길 기대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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