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원로 출판인의 시퍼런 열정

  • 입력 2007년 6월 30일 03시 00분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죽은 사람의 관직, 성씨를 적은 깃발)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려서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산문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네’ 번역문의 일부다. 누이의 상여가 떠나가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이다. 이별의 장면을 이리도 아름답게 포착할 수 있다니, 아름다워서 더욱 애잔하다.

이 번역문은 ‘태학산문선’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옥 같은 너를 어이 묻으랴’에 수록되어 있다. ‘태학산문선’ 첫 권이 나온 건 2000년 봄. 조선시대 한문 산문 가운데 명작들을 골라 단정한 문체로 번역한 시리즈다.

기획위원은 우리 고전문학의 매력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정민 한양대 교수와 안대회 명지대 교수. 이들의 명성에 걸맞게 이 시리즈는 한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숨은 공로자가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태학산문선’ 시리즈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종종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때마다 ‘이 시리즈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태학사의 변선웅 주간. 1940년생, 예순일곱 살이다. 1968년 민중서관을 통해 출판계에 입문했으니 벌써 40년째다. 한 번 읽고 던져 버릴 책이 아니라 10년, 100년 후에 사람들이 다시 찾을 만한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1970년대 을유문화사 시절, 변 주간은 특히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국학 분야의 논문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물론 학술 논문이 지금처럼 그리 많지 않았기에 가능했지만, 하여튼 그때 공부해 둔 걸 지금까지 써 먹는 셈입니다.”

지식산업사, 범조사, 두산동아 등을 거쳐 그는 1999년 태학사로 옮겼다. 그때 나이 이미 쉰아홉 살. 그러나 고전문학 학술지 ‘계간 문헌과 해석’을 발간해 왔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한문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태학산문선’을 탄생시켰다. ‘고종시대의 재조명’,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같은 ‘문화의 창’ 시리즈도 내고 있다. 지금은 중국 철학과 관련된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 “그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안 교수의 말이 실감날 정도다.

“젊은 사람들이 감각도 더 뛰어나고 일도 잘하는데 괜히 내가 그들을 방해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다”면서 스스로를 낮추는 변 주간. 그래도 흐르는 세월이나 나이가 그의 출판 열정만큼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필자를 만나고 기획을 하고 원고를 검토한다. 내일도 또 내일도, 책과 함께하길 기대한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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