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천재론]<17>소녀명창 김주리양

  • 입력 2007년 7월 5일 02시 59분


올해 중학교 3학년생인 ‘소녀 명창’ 김주리 양. 환한 미소와 적극적인 성격의 김 양은 “영화배우도 하고 싶고, 예술단 활동도 하고 싶다”며 당찬 꿈을 밝혔다. 김재명  기자
올해 중학교 3학년생인 ‘소녀 명창’ 김주리 양. 환한 미소와 적극적인 성격의 김 양은 “영화배우도 하고 싶고, 예술단 활동도 하고 싶다”며 당찬 꿈을 밝혔다. 김재명 기자
《“아이구,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쇼. 인당수 풍랑 중에 빠져 죽든 심청이가 살아서 여기 왔소. 아버지 눈을 떠서 청이 보옵소서∼.” 판소리 ‘심청가’를 마친 꼬마 여자 아이의 한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버렸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1년 동안 꾸준히 연습한 덕분에 목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 대신 9시간이 넘도록 서 있어 허리며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해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2003년 3월 전남 해남문예회관.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7시 반까지. 당시 11세이던 김주리(15·서울여중 3학년) 양이 장장 9시간 20분 동안 판소리 완창을 끝내자 장내는 떠나갈 듯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판소리 명창들도 힘들어하는 완창. 그것도 한 바탕도 아닌 ‘수궁가’와 ‘심청가’ 두 바탕을 막히는 대목 하나 없이 완창을 해낸 자리였다. ‘천재 소녀 명창’ 김 양의 이날 공연은 같은 해 영국 기네스협회의 월드레코드로 공식 등록됐다. 아마추어들의 ‘진기명기’ 분야가 아니라 마이클 잭슨의 음반, 힐러리 클린턴 씨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등과 함께 예술성을 인정받는‘아트&미디어’ 분야라 더욱 의미가 컸다. 》

○ 판소리도 조기교육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김 양은 4세 때 웅변학원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한글도 모르는 아이가 긴 대사를 쉽게 외웠고 무대에 서면 목청도 컸다. 젊은 시절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다 뒤늦게 소리를 배운 아버지 김덕은(40) 씨는 딸아이가 판소리 테이프를 듣고 사설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학원에 데려갔다.

아버지는 매일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광주에 있는 김선이 명창을 찾아갔다. 거기서 딸은 판소리를 배웠고 아버지는 북 장단을 배웠다. 영화 ‘서편제’처럼 아버지는 고수가 되고 딸은 소리꾼이 되어 연습을 시작했다. 여름이면 해남군 두륜산 계곡,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 계곡 등을 찾아 소리공부를 하던 김 양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토혈(吐血·반복된 연습으로 성대의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침에 섞여 나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김 양은 8세 때 동편제 ‘수궁가’를 완창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조상현 명창은 ‘천생만민(天生萬民)에 필수지업(必授之業)’이란 말로 “하늘이 사람을 낼 때는 각자의 업을 주는데 주리에게는 소리를 하라는 업을 준 것이 분명하다”고 신동의 탄생을 축하했다.

김 양은 올가을 김수연 명창에게서 배운 ‘춘향가’를 완창할 계획이다. 김 명창은 “판소리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것이지만 중학생만 돼도 목이 굳기 때문에 초등학교 이전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주리는 목청을 타고 난 데다 소리를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말했다.

○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김 양은 현재 국악중학교가 아닌 서울 마포구의 서울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평생 소리를 하며 살 것이니 중학교까진 일반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김 양은 평생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소리 선생님을 찾아 해남, 광주, 경기 부천시, 인천, 서울로 옮겨 다녔다. 전셋집에서 하루 종일 북 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느라 1년 만에 쫓겨난 적도 많다. 아버지 김 씨는 “남들은 조용한 집을 찾지만 우리는 일부러 시끄러운 집을 찾는다”며 “카센터 2층 집에 살 때 주리가 가장 맘 놓고 소리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잦은 전학에도 불구하고 김 양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학급에서 반장을 놓쳐본 적이 없다.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에 친구가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 판소리로 다져진 김 양의 재미있는 연설 솜씨는 반장 선거 때면 어김없이 몰표로 돌아왔다. 김 양은 “어려서부터 무대에 서 왔기 때문인지 남들 앞에 서는 게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담임교사 백인숙 씨는 “예체능 특기가 있는 아이들은 자기의 특기를 빙자해서 나머지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리는 친구들과의 공통 과제에도 적극 참여한다”며 “예술적인 끼와 리더십을 갖춘 주리는 스타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 양의 부모는 번갈아 직장생활을 하며 그를 뒷바라지 해 왔다. 판소리 완창을 앞두고 어머니는 새벽시장에 나가 목에 좋다는 싱싱한 횟감이나 생고기를 구해와 음식을 해 주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김 양이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한 번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완창 발표회에 드는 비용은 대관료를 포함해 1000만 원 정도. 다행히 김 양의 경우 한복은 디자이너 이영희 씨가 후원해 준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계에 비해 국악계에는 영재를 후원하는 기업의 메세나 활동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판소리(국악) 신동’이 나와도 예술가로 클 때까지 지원해 주는 시스템이 없어 중도에 포기하는 아이가 많다.

○ 김주리류 판소리를 만드는 게 꿈

“판소리를 들으면 우선 정겨워요. 가사에 옛사람의 지혜가 담겨 있어 교육적으로도 좋아요. 심청가엔 효(孝), 수궁가에는 충(忠), 흥부가에는 형제간의 우애가 담겨 있잖아요. 판소리는 소리도 좋지만 내용(가사)도 무척 좋습니다.”

김 양은 소리를 할 때 가사 전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요즘 클래식계에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유행이지만 김 양은 어릴 적부터 판소리를 하기 전 꼭 부를 대목에 대한 해설을 곁들였다. 김 양은 “판소리를 대중에게 더 알리기 위해 ‘천년학’에 나온 오정해 언니처럼 영화배우가 되고도 싶다”고 말한다. “스타가 판소리를 하면 사람들이 판소리에 더욱 관심을 갖지 않겠느냐”는 설명이다.

김 양은 단순한 명창을 넘어 ‘김주리류’ 판소리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스승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판소리에 자기의 색깔을 덧입힌 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면 새로운 유파가 탄생하게 된다. 퓨전음악으로 쉽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요즘 풍조와 달리 정통 판소리의 끝까지 가 보고자 하는 꿈이 대견해 보였다.

김 양은 스무살 이내에 판소리 5바탕을 완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성 명창 중 평생 판소리 5바탕을 완창한 사람은 오정숙 안숙선 명창 정도다. 김 양은 “판소리 완창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며 “공부해 온 것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더 큰 것에 도전하게 하는 힘을 준다”며 활짝 웃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 판소리 완창 얼마나 힘들기에

판소리 완창이 공연 형식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1968년 박동진 명창의 ‘흥부가’ 완창이 시초였다. 1930년대엔 ‘쑥대머리’나 ‘추월만정’ 같은 토막소리가 유행이었고 1940, 50년대엔 국극 같은 ‘연극소리’가 유행이었다.

판소리 완창은 특별한 수련과 공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어서 옛 명창들도 함부로 도전하지 못했다. ‘심청가’ ‘수궁가’ ‘춘향가’ ‘흥부가’ ‘적벽가’의 다섯 바탕 중 ‘적벽가’는 고난도의 목청 테크닉이 필요해 아무나 쉽게 도전하지 못한다.

흔히 완창을 마친 명창들은 “척추의 뼈마디 하나하나에서 진이 다 빠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적게는 3시간부터 많게는 8시간 동안 서서 창을 계속하려면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프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완창을 하면 살이 3∼5kg이나 빠지기 때문에 완창을 앞두고는 소화가 잘되는 생고기나 야채 위주로 식사를 하며 컨디션을 조절한다.

좋아하는 대목이라고 있는 기분을 다 냈다가는 완창을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추어들이 흔히 하는 실수다. 판소리는 마라톤과 같다. 전체적인 힘의 안배를 할 줄 알아야 완주를 한다. 그렇다고 밋밋하게 가사만 외운다면 감동을 줄 수 없다. 고수와 함께 관객을 밀고 당기는 흐름을 만들어 내야 명창이란 소리를 듣는다.

요즘엔 완창 판소리가 대세다. 완창을 못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국립극장에서는 매년 20∼30명이 완창 판소리 공연에 나선다. 1998년 유태평양 군이 6세 때 ‘흥부가’를 완창한 뒤로는 완창을 하는 ‘국악 신동’도 많이 나오고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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