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문선(33) 이은주(29) 주신옥(28) 김수연(25) 조윤(24) 씨 등
아시아나항공의 여승무원 5명과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의 야외카페에서 만났다. 때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작은 우산 속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믿어도 될까? 부슬비를 바라보며
‘와인 토크’를 나눴다.》
“소개팅 나가 콜라 따라주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 나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은주=실연요? 당연히 있죠. 잊으려면 일에 매달려요. 외국에 나가면 휴대전화 연결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잊는 데 도움이 되요. 좋은 곳 보고, 좋은 것 먹으면서 마음을 달래요.
▽주신옥=선배들과 자주 어울리는 편입니다. 둘러보면 실연의 아픔을 겪지 않은 분이 없어요. 선배들이 사주는 맥주와 따뜻한 위로로 청춘의 위기를 넘기죠. ‘내가 필요할 때 너는 없었다’는 식의 이별사는 정말 싫어요.
▽윤문선=외모는 20대처럼 보이지만 나이가 몇인 데요.(웃음) 당연히 통과의례처럼 많은 상처가 있죠.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 저만치 떠나간 뒤 나중에 사랑인 줄 아는 경우도 있어요.
▽김수연=모나지 않은 사람이 이상형이에요. 지금까지는 실패했지만 만나면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아요.
▽이=작은 우산 쓰고 함께 다닐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남자가 좋아요. 아무래도 한 해 절반 이상을 여행하기 때문에 이해심이 가장 중요해요.
▽주=저는 애인이 있다면 카트를 끌면서 함께 장을 보고 싶어요. 혼자 장보는 것에 워낙 질려서 그런것 같아요.
▽윤=착하고 이해심이 많은 것은 물론 중요하죠. 그렇지만 모든 여자가 아니라 내게만 잘 해주는 남자를 찾아요.
▽조윤=저를 승무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좋아해 주는 사람이 이상형이죠. 유니폼이 주는 환상이 생각보다 심각하답니다.
○ 비가 오면 생각나는…
▽윤=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마지막 이별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빗속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와이퍼 사이로 눈물로 이별을 고하죠.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감동적인 연기와 그에 어우러진 음악, 잊을 수 없습니다.
▽김=지금 장맛비가 내리고 있는데, 이런 날에는 아무래도 기분을 바꿔주는 음악을 듣게 됩니다. 일본 팝 밴드 ‘파리스 매치’의 ‘에브리웨어(everywhere)’. 또 군고구마와 부침개, 동동주…. 승무원들이 자주 가는 ‘○○칼국수’라고 있어요. 비행 뒤 속이 느끼할 때 먹으면 좋아요.
▽이=저는 쌀국수 집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죠. 베트남에서도 단골로 가는 곳이 있어요. 1달러면 먹을 수 있는데 얼큰하고 매워서 제대로 속을 풀어주죠.
▽주=아빠요. 의외죠? 막내라 학원에 다닐 때면 언제나 아빠가 마중을 왔어요. 어느 날 비가 왔는데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셨어요. 울면서 비를 맞고 갔더니 집에 계신 거예요. 길이 엇갈린 거죠. 달래면서 맛있는 것 사주던 아빠의 따뜻한 손길이 생각나요.
○ 내 인생 최고의 비, 그리고 여행
▽조=3년 전 입사할 무렵 동기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어요. 서류와 신체검사, 면접 등 5단계 시험을 보는데 최종 합격발표까지 3개월이 걸려요. 친구는 이미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전 눈이 좋지 않아 발표가 늦어졌어요. 7월 장맛비가 내리는데 식당에서 밥을 먹다 인터넷으로 합격을 확인했어요. 밖으로 나가 비를 맞으며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죠.
▽김=부모님과의 일본 3박 4일 여행이죠. 거의 매일 비행기를 타면서도 부모님과 여행할 기회가 없었어요. ‘효도여행’으로 마음의 빚을 덜었죠.
▽이=5월 초 오전에 인천을 출발해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따뜻한 라면을 맛본 뒤 저녁은 서울에서 먹었어요. 당일치기 해외여행인데 승무원이니까 가능한 즐거움이죠.
▽주=중학교 때 가장 친한 친구와 주머니를 털어 군것질을 하고 차비가 없어 비를 맞으며 돌아다닌 기억이 납니다. 먼저 결혼해 수원에서 살고 있는데 연락이 뜸해졌어요. 이 기회를 빌려 한마디 해도 되죠? “유미야! 시집도 먼저 가더니. 너무해. 연락 좀 자주 해.”
▽윤=1990년대 후반 영국 런던에 취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런던 템스 강 주변을 헤매면서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찾은 기억이 납니다. 트렌치 코트를 멋지게 입은 누군가와의 로맨스는 없었지만 작품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 승무원으로 산다는 것
▽김=가끔 명함을 건네거나 밖에서 보고 싶다는 승객도 있습니다. 일단 감사하죠. 예쁘게 봐 주시니까.
▽이=유니폼을 입으면 공인이기 때문에 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윤=연애 감정이 아니라 좋은 서비스를 해 줘 고맙다며 승무원 전체를 초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훈훈한 정을 느끼면서 피로도 씻은 듯이 사라져요. 며느리 삼고 싶다는 말씀도 많이 듣습니다.
▽주=‘소개팅’을 나가 상대방에게 콜라를 따라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기내에서 하는 것처럼 빈 캔을 한 손으로 쭈그러뜨리기도 해요. 몸에 밴, 직업병 같은 거죠.
▽이=(웃음) 비슷해요. 사적인 모임에 나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것저것 하고 있다니까요. 팔이 얼마나 굵어졌는지 몰라요. 식사용 카트에 많을 때는 56명분량이 들어가요. 자칫 뒤로 밀리면 승객들이 부딪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버티는 거죠.
▽윤=장마철이면 사실 안전 문제 때문에 몇 배 더 긴장합니다. 최근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사고 소식을 듣고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만 세게 불어도 각종 비상 상황에 대한 대책을 숙지하고 더 신경을 쓰죠.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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