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한 인생 같으니라고.
휴가를 줘도 어떻게 보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혹시라도 조물주가 보게 된다면 아마도 이렇게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게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어떻게 얻은 황금 같은 휴식인데 그것도 제대로 쓸 줄 몰라 쩔쩔 매냐고.
일 하는 데는 도사인 한국 사람들. 그런데 놀고 먹는 데는 마냥 초보다. 글쎄 이게 순진한건지,아니면 바보 같은 건지.
하긴 주당 근무시간이 세계 최고(55.8시간)를 기록할 정도로 일을 해대니 노는 데 먹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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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휴식 하나 제대로 취할 줄 모르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한국의 가장은 슬프다.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도 마음 내키는 대로 가족휴가 한번 제대로 갖기 어려운 ‘복잡한’ 환경 때문이다.
어쩌다 기분 내서 가족 나들이라도 한번 해볼라 치면 그 허가를 득하는 절차가 복잡다단하다.
첫째아이 학원수업에,둘째아이 친구 생일파티에,마누라 동창회에,집안 어른 경조사에….
씨줄 날줄로 촘촘히 엮인 빡빡한 가족 스케줄 속에서 과연 우리 가장은 가족의 휴가 계획이란 것이 가능할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애들이 어릴 때만 해도 좀 낫다. 그런데 큰아이가 중3만 돼도 가족여행은 가장에게 ‘눈치여행’으로 전락한다.
모처럼 가족여행이나 가자고 생색내듯 낸 아이디어. 그러나 그 말은 끝나기도 전에 마누라로부터 날아온 세상 물정 모르는 실없는 소리라는 핀잔에 묻혀 허공의 메아리처럼 공허해진다.
애들 시험이 낼모렌데 아빠가 돼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바람만 들게 한다는 볼멘소리에 가장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한다.
여행사 상담창구에서 늘 일어나는 일을 보면 오늘날 가장이 처한 현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TV 채널과 신문 구독,자동차 색깔 선택권에 이어 이제는 가족여행 결정권마저도 엄마 몫이 됐기 때문이다.
긴 상담 끝에 드디어 행선지와 날짜,가격을 결정하고 예약을 해야 할 순간.
그러면 틀림없이 이런 대답을 듣는단다. “집사람에게 물어보고요.” 오호애재라.
이 시대에 가장이 집안일 가운데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과연 무엇이 남아있는지.
이런저런 사정으로 여름휴가는 가장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주부들이여.
올 여름만큼은 이 불쌍한 가장을 위해 여름휴가 계획을 스스로 만들어 선물함이 어떨지.
아이들 스케줄 잘 정리해서 아빠 스케줄에 맞추고,연예인과 매니저 사이처럼 서로 속사정을 잘 아는 아이와 엄마가 합심해서 아빠가 정말로 편히 쉬고 산뜻한 마음으로 직장에 복귀할 수 있게 멋진 계획을 만들어 도와주면 어떨지.
가장과 아빠에게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름휴가가 될 테니까.
글·사진=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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