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묘미는 같은 프랑스 출신 남성 감독 쥐스트 자캥 감독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비교를 통해 얻어진다. 1980년대 에로영화를 대표했던 자캥의 영화가 남성의 관음증적 시각으로 성의 해방을 그려냈다면 페랑의 영화는 자연과 합일하는 육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예를 들어 두 영화에서 모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나신을 꽃으로 장식하는 장면에서 전자가 사람의 몸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후자는 꽃에 더 초점을 맞췄다. 채털리 역의 마리나 핸즈는 자캥의 영화에서 같은 배역을 맡았던 육체파 여배우 실비아 크리스텔에 비해 빈약한 몸매를 지녔지만 섬세한 눈매와 미묘한 손길을 통해 메마른 육체에 풍만한 기쁨이 깃드는 순간을 끌어냈다.
말런 브랜도를 닮은 파킨(소설에서는 멜러즈) 역의 장루이 쿨로슈 역시 배불뚝이 아저씨의 몸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범한 몸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욱 절박하게 다가서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거침없는 노출에도 불구하고 동양화의 홍운탁월(烘雲托月·구름을 그려 자연스럽게 달의 모습을 드러냄)을 실현한 셈이다. 18세 이상.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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