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을 때 느꼈던 공포를 기억한다. 뒤이어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라는 다급한 안내방송. 전쟁이 일어나는 걸까, 두려움에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이웅평 씨 귀순,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등으로 1983년엔 ‘실제상황’이라는 사이렌 소리가 잦았다. 재미난 일도 많았을 텐데, 꽤 오랫동안 1980년대 하면 그때의 두려움부터 떠올랐다.
문학도 80년대를 오래 기억했다. 민주화항쟁과 이데올로기, 두려움과 상처의 시대로서. 소설이란 기억의 서사이니, 80년대를 열정적으로 살아냈던 작가들이 저항과 투쟁의 시대로서의 80년대를 문학에 담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80년대적 기억은 시대에 대한 상처뿐일까. 최근 작가의 소설들은 ‘다른 80년대’가 있었다고 알려준다. 이 작가들이 기억하는 80년대는 일상적인, 그리고 지극히 문화적인 시대였다.
하성란(40) 씨의 소설집 ‘웨하스’(문학동네)에 실린 단편 ‘1984년’. 작가가 기억하는 그해는 ‘유리 겔라의 해’였다. 이스라엘인 유리 겔라가 방한해 TV에 나와 손도 대지 않고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을 보였던 것. ‘음성 변조기를 통과한 듯 늘어지고 웅웅거리는 말소리였다. “너어언 하알 쑤 있어어. 수우까락으을 구우부려어.”’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교만 마치면 곧바로 직장을 구해야 하는 ‘나’. 조지 오웰의 암울한 장편 ‘1984년’ 같은 시기였지만, ‘나’에게는 시대의 그늘보다 “너어언 하알 쑤 있어어”라는 ‘초능력 멘트’가 성큼 와 닿았던 때였다.
이번 주 출간되는 정이현(35) 씨의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문학과지성사)에는 ‘비밀과외’라는 단편이 실렸다. 1985년, 중학생이 된 주인공 소녀가 비밀과외를 시작한 때, ‘공중에는 꽃가루들과 함께 지독히 매운 최루탄 입자가 흩날려 다녔지만 일상은 뭉게뭉게 흘러가고 아이들은 자라던’ 때이다.
‘기지 바지에 월드컵 운동화’가 유니폼이었던 과외 선생님. 같은 반 반장, 농구선수 허재를 좋아하던 것처럼 과외 선생님한테 빠져버린 소녀는 그러나, 그해에 풋사랑의 상처를 입는다. 밀크셰이크도 사주고 대학교도 구경시켜 주던 과외 선생님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발길을 뚝 끊어버린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1985년은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다 옳은 건 아니다”라던 선생님의 비장한 목소리보다, 선생님의 옆모습을 바라볼 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때였다.
지방 소도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김애란(27) 씨의 단편 ‘스카이콩콩’.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에 수록된 이 단편은 ‘과학동아’를 보는 형과 스카이콩콩을 타는 동생이 자라나는 모습을 찬찬히 묘사한다. ‘코오오오-옹 하고 뛰어올라 코오오오-옹 하고 착지하는 게 아니라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려면 정신없이 콩콩콩콩콩-거려야 했던’ 스카이콩콩은, 그렇게 정신없이 콩콩거리면서 보낸 유년기의 기억을 대표한다.
옥토끼 연필, 나이키, 서주우유, 100분쇼…. 생각해 보면 80년대엔 이런 것들도 있었다. 386세대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80년대적 기억에 대해, 요즘 작가들은 이렇게 다른 기억들을 보여 준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문학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풍부해진다. 주말, 당신이 기억하는 80년대는 어떤 것인지, 그때 누렸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 당신에게 시대에 짓눌린 모습이 아닌 다른 소중한 얼굴도 있었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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