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마다정 외 지음·서길수 옮김/792쪽·3만8000원·여유당
고구려연구회 서길수(서경대 교수) 이사장의 저력을 보여 주는 2권의 책이 동시에 출간됐다. 하나는 유럽에 고구려를 소개한 프랑스 및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2년 시작된 중국 동북공정의 나침반 역할을 한 ‘고대 중국 고구려역사 총론’(2001년)을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이 두 권을 펴내기 위해선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해야 한다. 독학으로 공부한 에스페란토어로 세계에스페란토어협회 이사에 선출될 만큼 뛰어난 서 교수의 어학 실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명의 학자가 쓰고 옮겼지만 고구려에 대한 두 책의 인식은 크게 다르다.
먼저 ‘한말유럽학자의 고구려연구’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주인공은 1865년생으로 나란히 대학에 진학한 뒤 동양어학교에서 동문수학한 모리스 쿠랑과 에두아르 샤반.
쿠랑은 국내에서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유럽에 소개한 학자로 더 유명하지만 1898년 유럽에 최초로 고구려 광개토태왕비문을 소개한 학자이기도 하다. ‘고구려왕국의 한문비석’이란 그의 논문은 1884년 태왕비를 발견한 일본을 빼고는 최초의 연구였다.
이들의 연구는 몇몇 오류는 있었지만 훗날에도 감탄할 만큼 사실관계에 충실했다. 쿠랑은 광개토태왕비문을 프랑스어로 옮기며 “한국의 지명과 인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한국 발음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또 그가 그린 고대 역사지도에서 현재 중국 지린(吉林) 성 일대 부여의 영토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 읍루를 중국어 한자 발음이 아닌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옮겼다.
샤반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면서 당시 중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고구려유적이 훼손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장수왕릉 위에 별도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보고했고 태왕릉을 처음부터 광개토태왕릉으로 추정했다.
반면 ‘∼총론’을 번역한 ‘중국이 쓴 고구려 역사’에서는 당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존 연구를 손바닥 뒤집듯 한 파천황적 행태를 펼치는 중국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동북공정의 야전 지휘관 마다정(馬大正)은 머리말에서 “고구려는 중국 동북역사의 소수민족 정권”이며 “고구려·고려와 조선을 구별하라”고 처음부터 연구방향을 못 박았다. 그러면서 책 말미에는 “이전의 일부 대가, 권위 있는 견해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다른 견해를 내놓고 논쟁을 벌여야만 인식의 비약과 연구 결과에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혀 이러한 방향에 어긋나는 기성 연구를 과감히 무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민족편을 맡은 양바오룽(楊保隆)은 “고려를 세운 왕건은 중국 성씨”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동북공정 초기부터 이미 고려사 침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치편을 맡은 리다룽(李大龍)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도 중국 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했다. 백제가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 부여계가 세운 나라이고 신라의 전신인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으로도 불린 것은 중국 진(秦)나라 사람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주장과 함께….
같은 필자들이 2003년 발표한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속론’을 지난해 ‘동북공정 고구려사’(사계절)란 책으로 펴낸 서 교수는 “동북공정이 고구려를 빌미로 처음부터 삼국사는 물론 고려까지 역사 침탈을 계획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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