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그렇게 조용했던 오전에 터졌다.
‘북괴군, 판문점서 미군 장교 2명 참살’, ‘도끼, 곡괭이 휘두르며 백주(白晝)의 만행(蠻行).’(동아일보 1976년 8월 19일자 1면)
이른바 ‘도끼 만행 사건’으로 잘 알려진 참극이 빚어진 것은 18일 오전 10시 45분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 유엔군 초소 근처에서 인부들이 가지치기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유엔군과 한국군 장교, 사병들이 작업을 보호 감독 중이었다.
느닷없이 북한 인민군들이 다가와 “중단하라”며 시비를 걸었다.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지다 갑자기 “죽여라”는 고함이 들렸다. 30여 명의 인민군은 경비 중이던 군인들을 현장에 있던 도끼와 삽, 몽둥이로 무차별 내리쳤다.
가까스로 현장을 빠져 나온 작업반장은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두려움에 떨었다.
“인간의 짓이 아니었습니다. 격분을 달래다 못해 막걸리를 퍼마셨습니다만 아직도 이렇게 몸이 떨립니다.”
유엔군 소속 미군인 아더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버렛 중위가 사망했다. 전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작가 제프리 밀러가 사건 25주년을 맞아 현장에 있던 사병들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한국 영자지에 기고한 글은 사건 직후의 긴박한 상황을 잘 전한다.
“3소대 소속 스프래그가 숙소에서 몽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훈련 상황이 아니라는 소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3소대는 2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전투 헬기가 날고 있었다. 오산기지에선 폭격기와 전투기가 발진 대기 중이었다. 항공모함 미드웨이가 한반도로 향했다.”
김일성이 21일 유감의 뜻을 전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후계 체제 아래 권력을 키워가던 김정일이 주도한 ‘계획된 기습’이었다는 설(說)이 있었지만 확인은 불가능했다.
당시 미군 지휘관이었던 빅터 비에라 예비역 대령이 최근 방한했다. 그는 17일 현장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참석했다.
강산이 3번 변한 뒤 다시 찾은 현장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건 당시 대치했던 인민군 부대가 개성공단이 들어서면서 후방으로 물러났다는 얘기를 듣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한국의 대통령이 판문점을 직접 거치진 않지만 육로로 북한을 방문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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