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성벽에 흐르는 ‘한여름 밤의 터치’

  • 입력 2007년 8월 2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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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꿈과 200여 년의 역사가 서린 수원 화성은 젊은 영상미술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상상력을 제공했고 작가들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신선한 디지털 영상으로 화성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장안문에서의 영상 전시(김혜란 씨 작품). 사진 제공 우일
정조의 꿈과 200여 년의 역사가 서린 수원 화성은 젊은 영상미술 작가들에게 매력적인 상상력을 제공했고 작가들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신선한 디지털 영상으로 화성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다. 장안문에서의 영상 전시(김혜란 씨 작품). 사진 제공 우일
《전통 성곽과 디지털 영상미술과의 만남.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기 수원시의 화성(華城·1796년 건축)에서는 요즘 밤마다 이색 영상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07 수원 화성 국제연극제’ 행사의 하나로 기획된 영상미술전 ‘한여름 밤의 꿈’. 25일까지 매일 오후 8시∼11시 30분 화성의 서북공심돈과 장안문에서 젊은 작가 6명이 화성의 건축물과 성벽을 캔버스와 스크린 삼아 멀티미디어 영상미술을 선보이는 자리다.

성곽을 무대로 영상미술전이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성곽과 영상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가슴 설레게 하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18일 오후 10시 서북공심돈 앞.

서북공심돈은 화성의 서쪽 정문인 화서문 바로 옆에 위치한 망루.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겨우 윤곽만 드러낸 서북공심돈과 성벽 위로 갑자기 밝은 조명이 쏟아졌다.

그 위로 꽃이기도 하고 풀이기도 한 무언가가 바람결에 흔들리더니 후드득 낙엽이 졌다.

그 서늘함에 더위가 싹 가시는 듯했다.

기이한 모습의 사람들이 걸어가고, 알듯 모를 듯 추상적인 이미지의 영상들이 잇달아 울퉁불퉁한 성벽 표면 위를 스쳐갔다.》

수원 화성 국제연극제 영상미술전 25일까지… 야외무대와 디지털미술 “완벽한 조화”

벽돌과 벽돌, 돌과 돌이 만나 만들어 낸 선들은 영상물의 배경이 되어 주었고, 벽돌과 돌의 거친 질감이 영상물과 어우러지면서 18세기 수원 화성은 순식간에 21세기의 디지털 예술 무대로 다시 태어났다.

가은영 김경민 김시헌 김혜란 조나현 최승준 씨 등 젊은 영상미술 작가 6명의 작품은 때로는 구체적이고 때로는 추상적이었다. 만화 같기도 하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같기도 했다. 이들의 영상 메시지는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현대 사회를 되돌아보자는 것이었다. 특히 김혜란 씨의 경우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사람 혹은 동물 같이 보이도록 처리함으로써 현대인의 고뇌를 보여 주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은 메시지보다도 야외 영상미술전의 분위기였다. 서북공심돈 앞에 몰려든 관객은 이미 1000명을 넘어섰다. 한여름 밤의 이색 풍경에 놀란 운전자들이 차를 멈추고 영상전을 관람하느라 주변 도로가 막히기도 했다.

30여 분 지났을까. 먼발치에서 드럼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수원 화성 국제연극제에 참가한 프랑스 극단 ‘트랜스 엑스프레스’ 단원들이었다. 이들은 관객 사이를 돌며 분위기를 돋운 뒤 크레인에 몸을 싣고 30m 정도 하늘로 올라가 다양한 음악과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이들의 고공 연기는 서북공심돈에 펼쳐지는 다양한 영상 미술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야외 영상미술전은 그 무대가 화성이었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 있었다. 화성은 국내에서 가장 과학적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성곽. 성벽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에 설치된 구조물들(성문, 망루 등)이 매우 다채롭기 때문에 다양한 조형미 연출이 가능하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애초부터 미술 무대로서의 완벽한 구조와 미학을 갖추고 있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영상미술이 전시장의 울타리를 넘어 야외 공간에서 관객을 만난 것이다. 그것도 오래된 전통 성곽에서. 전시를 기획한 이혜리 큐레이터의 설명.

“디지털 멀티미디어아트와 역사적 현장이 결합하는 새로운 미술 세계를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시공을 뛰어 넘어 전통과 현대의 소통, 일반 시민과 미술의 소통에 역점을 두었죠.”

그래서였을까. 자정이 될 때까지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고 곳곳에서 “아이스케키∼” 하는 외침도 들려왔다. 미술 전시공간에서 ‘아이스케키’라니. 예상치 못한 유쾌한 만남. 이 역시 또 하나의 소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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