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8월 21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하와이를 준(準)주에서 정식 주로 승격시키는 법안을 공포하자 하와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하게 주 승격 운동을 벌여 온 하와이 주민의 환호 속에 성조기의 별은 50개로 늘어났다. 미국의 속령이 된 지 59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하와이는 이미 하와이인의 땅이 아니었다. 당시 56만 명의 주민 가운데 60%가 백인과 일본인이었다.
여러 부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하와이 제도는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도착한 뒤 격변기를 맞았다. 카메하메하 1세는 향료와 맞바꾼 서양식 총포를 앞세워 다른 부족을 하나씩 정복했다. 1795년 왕국을 세워 스스로 대왕이라 칭한 그는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와이의 전통 신앙을 유지해 평화로운 왕국의 틀을 다졌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서양인과의 교류는 하와이 원주민에게 독(毒)이 되어 돌아왔다. 전염병으로 20여만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재배를 위한 대형 농장이 생겨나면서 원주민의 입지는 좁아졌다.
1800년대 중반 농업 이민이 급속히 늘어나고 토지 매매가 허용되면서 하와이인은 백인에게 토지를, 아시아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
토지와 자본을 앞세운 백인들은 왕권까지 위협했다. 제7대 칼라카우아 왕은 일본을 끌어들여 백인 농장주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민병대의 총칼 앞에 결국 왕권을 제한하는 헌법에 서명했다.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원주민의 권리를 강화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지만 민병대가 이올라니 궁전을 봉쇄하자 1893년 왕위를 포기했다. 백인 농장주들이 세운 임시정부는 이듬해 하와이 공화국을 수립했다. 대통령이 된 샌퍼드 돌은 활발한 교역을 위해 미국에 합병을 요청했고 1900년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 돌 가문이 만든 과일유통회사인 ‘돌(Dole)’은 세계적인 상표가 됐다.
세계적인 석학 놈 촘스키는 이를 두고 “무심코 돌 파인애플의 깡통을 따는 것은 미 제국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라는 독설을 내뱉었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여 떠나리.’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을 보고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지었다는 하와이의 대표적인 노래 ‘알로하오에’는 사랑하는 조국을 버리고 떠났던 그의 한 맺힌 ‘하와이 아리랑’일지도 모른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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