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프랑스 파리의 어느 날 아침에 시작된다. 수채화로 그려진 파리의 집 풍경은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난다.
“어떡하지, 내 도감이….”
소녀가 아끼던 도감의 낱장들이 주르르 흐른다. 책이 망가졌다. 그림 속 아이는 표정이 없지만, 애잔한 분위기의 그림과 안타까운 한마디 때문에 아이의 심정은 독자에게 성큼 전달된다.
더 멋진 식물도감도 많지만 소녀는 새 책을 사고 싶지 않다. 갖고 있던 책에 정이 들어서다. 책가게 아저씨가 말한다. “그렇게 중요한 책이면 를리외르를 찾아가 보려무나.”
그림 하나에 한두 줄 문장.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색깔이 조금씩 번진 수채화 그림 속에서, 파리의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를리외르 아저씨를 찾는 소녀와, 자신의 가게로 출근하는 를리외르 아저씨의 모습이 번갈아 보인다. 가게 앞에서 만난 두 사람.
책이 이리 되도록 많이도 봤구나. 전 나무가 좋아요. 이 책엔 나무에 대한 건 뭐든 다 나와 있어요. 그럼 먼저 책을 낱낱이 뜯어내자꾸나. 아저씨, 아카시아나무 좋아해요? 이 표지는 제 몫은 다한 것 같으니 새로 꿰매자꾸나. 아카시아꿀은요, 참 향긋해요.
따옴표가 없는 대화는 물 흐르듯 읽힌다. 동문서답하는 듯하지만 어색하기는커녕 사랑스럽다. 를리외르 아저씨는 책을 실로 땀땀이 꿰맨다. 풀칠을 하고 말린다. 책 등을 망치로 두드려서 둥글려 줘야 책장이 잘 넘어간다. 찬찬히 책을 매만지는 아저씨의 모습은 책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를리외르(relieur)는 프랑스어로 ‘제본’이라는 뜻이다. 책을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튼튼하고 아름답게 보수해 주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프랑스에는 1500여 명의 를리외르가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에도 예술제본 전문공방 ‘렉또베르쏘’ 등에서 를리외르를 양성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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