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 채수정 씨(38)는 화려한 한복을 좋아한다. 그는 “결혼할 때도 쪽지고 한복입는 것이 노래 부르러 무대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씩 새하얀 소복을 입고 신명나게 노래를 한다. 바로 ‘굿판’이다.
채 씨는 국악계에서 남부럽지 않은 재원이다. 명창 박록주-박송희 선생의 판소리 ‘흥보가’ 이수자로서 2002년 프랑스 리옹에서 ‘흥보가’를 공연하기도 했다. 또한 경희대에서 국문학 석사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한국음악과에서 박사과정(판소리) 중에 있으면서 국내 여러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먹물’ 깨나 든 명창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국악계 어르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년 전 굿판을 찾았다. 1996년 MBC라디오 ‘좋은 아침 우리가락’이라는 라디오 프로에서 구성작가로 일하던 그는 진도 채정례 당골의 ‘씻김굿’을 듣고 가슴에 쌓여있던 고민이 ‘탁’하고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판소리의 신명을 어떻게 되살릴까 고민이 많았죠. 그런데 함께 울고 웃는 굿을 보니까 ‘판’의 의미를 깨닫게 됐어요. 굿은 더 이상 녹음기나 디지털 카메라로 녹화만 할 것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직접 배워야 한다. 나도 굿판에 서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채정례 당골을 따라 진도의 초상집을 돌아다니며 굿판에 섰다. 사람이 죽었을 때 영혼을 정화하는 ‘씻김굿’, 아이를 낳도록 빌어주는 ‘제황맞이굿’, 이사갈 때 ‘성주굿’…. 굿에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다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진도군수가 채 씨를 보고 “따님이 판소리해서 교수되는 줄 알았더니 당골네 됐습니다”고 말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채 씨는 “판소리가 예술이면 굿은 ‘어머니 예술’이다. 이 기회에 못 배우면 영영 배우지 못한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
“굿은 한국 전통 가무악의 어머니 ‘자궁’같은 존재입니다. 판소리, 산조, 민요 등은 굿판에서 기원한 것이 많아요. 시나위는 굿판의 즉흥반주 음악이고, 경기민요 ‘창부타령’은 경기 도당굿에서 불린 노래, 살풀이춤은 굿판에서 살을 풀어내는 춤이예요. 판소리, 산조, 살풀이는 위대한 예술로 존중하면서, 모태가 된 ‘굿’을 별종으로 보면 안됩니다.”
채 씨는 신 내림을 받은 ‘강신무’도 아니고, 당골인 어머니를 따라 무당이 된 ‘세습무’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학습무’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우렁찬 목청과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굿판을 휘어잡는다. 처음엔 슬피 울던 사람들도 그의 ‘씻김굿’ 막바지엔 기쁨에 차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는 “굿은 미신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놀이이며 정신치료제”라며 “‘세습무’는 자신들의 예술성을 자식들에게 철저하게 전수해온 예능인 집단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채 씨는 15일 오후 2시부터 다음날 새벽5시까지 무박2일간 경기 의정부 문화의전당 앞마당에서 벌어지는 큰 굿판에 참여한다.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굿 음악제’. 소리꾼 채수정이 중앙무대에서 ‘당골’로서 ‘커밍아웃’하는 순간이다. 채 씨의 ‘전라도 씻김굿’과 강태환(섹소폰), 박재천(퍼커션), 미연(피아노), 강은일(해금), 록 밴드 ‘크라잉 넛’ 등이 함께 어우러지며, 김매물 만신의 ‘황해도 굿’도 펼쳐진다. 02-2653-5133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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