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원의 펄프픽션]이케가미 에이이치 ‘샹그리라’

  • 입력 2007년 9월 8일 02시 59분


폭염 폭설 폭우로 지구가 동요하고 있다. 남동부 유럽의 수은주가 섭씨 45도를 기록하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00년 만에 눈이 내렸다. 알프스, 히말라야의 만년설은 녹아 없어지고 있고, 열대성 사이클론이 중동을 강타했다. 22세기 SF의 배경이 아니라 2007년 8월의 실제 상황이다. 이미 망가진 지구에서, 웬만한 종말론에도 끄떡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SF를 쓴다는 게 얼마나 머리에 쥐나는 일일까.

이케가미 에이이치의 ‘샹그리라’는 ‘환경파괴로 황폐해진 미래’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뉴로맨서’ 이후 다져진 정통 SF의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다. 미래 사회는 영화 ‘가타카’처럼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메트로폴리탄’과 같이 ‘아틀라스’라는 천상 세계와 ‘두오모’라는 지상 세계로 양분돼 있다.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처럼 온갖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비정 사회에, 곧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구니코’가 강림해서 지구를 구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샹그리라’는 기존 SF와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보통 ‘녹색 자연을 구하자’는 식의 메시지가 떠올라야 정상인데, 반대로 ‘매연을 내뿜는 굴뚝’이 향수처럼 여겨진다. 미래 세계는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를 최우선으로 삼는 ‘탄소경제’ 시스템으로 유지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도쿄(東京)를 전면 녹지화하고, 대신 인공 지반 위에 거대한 아틀라스를 건립해 선택된 사람들만 살게 한다. 지상에 남은 사람들은 시멘트와 콘크리트의 회색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숲과 싸워야 한다. 황당하면서도 일가견 있는 설정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액션이 압권이다. 소설책을 들고 있는 건지,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인 저패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주얼이 강하다. 세일러복을 입고 부메랑을 손에 든 여전사 구니코, 에르메스 가방과 에스티 로더 립스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트랜스젠더 모모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의태장갑을 손에 든 구사나기 소좌, 거짓말하는 시종들을 능지처참하는 밤의 여왕 미쿠니 등 10명이 넘는 캐릭터가 모두 만화보다 더 과장되고 생생하다.

‘샹그리라’에는 음양사와 귀신들이 활보하던 과거의 도쿄, 명품이 즐비한 현재의 도쿄, 탄소를 내뿜는 미래의 도쿄가 혼재해 있다. 다만 ‘일본이 500년의 패권을 쥘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미래 사회를 묘사한 부분, 호시탐탐 러시아와 중국 대륙을 넘보는 설정 등 일본에 국한된 일부 대목이 아쉽고 섬뜩하다.

한혜원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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