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부터 시작된 스리 테너 콘서트로 그를 만난 사람은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좋은 친구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동료이기에 앞서 치열한 라이벌 관계였는데도 말이다. ‘파바로티와 친구들’이란 일련의 콘서트 실황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팝스타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린 친근한 ‘뚱보 아저씨’로 파바로티를 기억할 것이다.
반면 오랜 오페라 팬은 테너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기억하는 동시에 전성기가 한참 지난 다음에도 무대에 올라 결코 좋은 상태를 보여 주지 못했던 쇠락한 스타를 떠올릴 것이다. 이처럼 만년의 파바로티에게 가장 각박한 평가를 내린 것은 오페라 공연계와 고정 관객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한 가지는 명확하다. 파바로티만큼 인종과 종교를 넘어 폭넓은 사랑을 받은 오페라 가수는 없었다. 물론 안티도 많았지만 유명세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하이 C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았다. 파바로티는 결코 고음에만 능한 테너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성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오히려 고음을 두려워했으며, 실연에서 지휘자와 협의해 슬쩍 반음을 낮춰 부른 일도 허다했다. 이 별명 때문에 파바로티가 본 손해는 그 뛰어난 음악성에 대한 평가다. 파바로티는 음표 하나하나보다는 그 흐름에 유의하라는 스승을 만난 탓에 악보 초견(初見) 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 대신 피아노로 몇 번 듣는 것만으로 오페라 한 편을 전부 외울 수 있었다. 또 스승의 가르침대로 가사의 리듬과 뉘앙스를 맛깔스럽게 살리는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능력은 선배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더불어 최고였던 것 같다.
파바로티의 다소 어수룩한 인상도 인기에 일조했다. 그가 잘 불렀던 ‘사랑의 묘약’ 중 네모리노의 순진하면서도 뚝심 있는 이미지와 겹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테너를 이해하는 비밀의 열쇠다. 덜 성숙했다 싶을 정도로 순수하고 혈기가 넘치는 바람에 비극을 초래하는 역. 파바로티와 잘 어울리지 않는가? 그의 최대 라이벌 플라시도 도밍고는 이런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형인 벨칸토 레퍼토리에 강점을 지녔고, 도밍고는 베르디 중기 이후의 레퍼토리와 프랑스 오페라에 더 강했다.
1990년대 이후 테너의 제왕 자리는 파바로티에게서 도밍고로 넘어갔다는 것이 중론이다. 파바로티가 쇠퇴기를 맞이했음에도 여섯 살 연하의 도밍고는 녹슬지 않은 음성을 자랑했다. 또 지휘자로, 오페라 극장의 감독으로 승승장구했다. 파바로티로서는 샘이 났을 것이다. 도밍고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플랜으로 지구촌과 오페라계를 위한 활동을 수행한 반면, 파바로티는 ‘파바로티와 친구들’로 벌어들인 거액을 몇 번이나 쾌척하고도 이벤트성으로 끝낸 아쉬움이 있다. 수더분했지만 꼼꼼하지 못했던 성격 탓이리라.
이제 파바로티는 떠났다. 하지만 진정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 초반부터 약 10년간 남긴 녹음은 천하의 도밍고라도 따라가기 힘든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21세기 오페라 팬들은 그의 노추(老醜)를 잊고 카루소나 마리아 칼라스의 전설처럼 파바로티를 기억하리라 믿는다.
유형종 오페라평론가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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