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로부터 2년여 후인 1971년 9월 13일 린뱌오 가족을 태운 중국 군용기 256호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후계자’는 마오의 암살을 모의한 ‘매국노’로 단죄됐고 당적에서도 제명됐다.
린뱌오는 항일 투쟁과 국공(國共) 내전 때 혁혁한 공을 세운 군인이었다. 1955년에는 마오에게서 ‘원수(元帥)’ 직급을 부여받았고 1959년에는 국방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린뱌오는 더 큰 권력을 원했다. ‘대가는 가장 적고, 수확은 가장 많으며, 시간은 가장 빨리’ 권력을 손에 넣고자 했던 린뱌오는 마오의 절대 권력에 기대기로 했다.
당시 마오는 자본주의 성향의 실권파 류사오치(劉少奇)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급진적인 경제정책인 ‘대약진’ 운동이 경제를 파탄 내고 약 2000만 명의 아사자만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린뱌오는 마오의 외로움을 ‘마오의 신격화’로 파고들었고 이는 마오의 문화혁명이 불길처럼 번지게 한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문혁을 통해 실권파를 밀어내고 권력을 되찾은 마오에게 힘입어 린뱌오는 후계자 지위에 올랐지만 곧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마오가 뜻밖에 당시 공석이던 국가주석 폐지를 들고 나오자 린뱌오는 마오의 국가주석 취임과 ‘마오 천재론’을 제안했다.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이 되고자 하는 포석이었는데 그것이 패착이었다.
린뱌오의 야심을 꿰뚫어본 마오가 천재론을 주장하는 린뱌오의 측근들을 사기꾼이라고 몰아세우며 린뱌오를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위험을 느낀 린뱌오는 무력을 통한 권력 탈취를 기도하다 발각되자 서둘러 소련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비행기 ‘사고’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마오는 후에 “린뱌오가 달아나지만 않았다면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 단순 사고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모택동 비록’)
그러나 린뱌오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시대 변화를 외면하고 마오의 개인 숭배론에 매달린 어리석음이었다. 민심은 문혁의 광기를 잠재우고 국정이 정상화되기를 원했다.
대미 강경파가 힘을 잃고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시대는 혁명가가 아니라 실용주의자를 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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