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몽환의 도시 헤매다…‘그곳이 어디든’

  • 입력 2007년 9월 15일 03시 00분


◇그곳이 어디든/이승우 지음·308쪽·9800원/현대문학

남자 ‘유’는 서리라는 곳으로 가고 있다. 지도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읍이다. 그는 사표를 내든지 서리 지사로 가든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혼자 서리로 가기로 했다. 5년여 함께 산 아내가 있지만, 아내는 병으로 죽어가는 전남편을 돌봐야 한다며 떠났다. 서리로 가는 ‘유’의 심정은 참담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렇다고 이전에는 행복했던가, 자문하면 답할 수 없다.

이승우(48) 씨의 장편소설 ‘그곳이 어디든’은 ‘서리’라는 한 도시의 모습을 음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는 생의 근원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개성적인 작품 세계로 독자층이 탄탄하며, 프랑스 페미나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르는 등 국외에서도 인정받는 작가다.

‘그곳이 어디든’은 ‘이승우표 소설’이면서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는 소설에서 생의 이면을 탐색하는 작업을 계속하지만, 그 이야기는 추상적이지 않다. 문장이 짧지 않지만 귀로 들어도 곧바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평론가 강유정 씨는 “신과 배반, 비겁과 도피가 아무렇지 않게 한 문장에서 얽히고 대치한다”고 말한 바, 신(神)을 한눈에 보고 기술하는 듯한 인물의 명료한 사유와 행위는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을 갖고 있다.

‘유’는 업무를 인계해 줄 박 과장을 찾아다니지만, 서리에서 박 과장은 찾을 수 없고 그가 사람들에게서 듣는 얘기는 “빨리 서리를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오”라는 말이다. 서리는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곳이라는 것. 여관방에서 함께 밤을 보낸 여자에게 지갑을 털리고 건달에게 폭행도 당하고 자동차 기름까지 바닥난 ‘유’는 이상하게도 아내에게, 어머니에게 전화해도 도와 달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거지꼴이 된 ‘유’가 흘러가는 곳은 ‘미친 노아’라는 노인이 살고 있는 서산봉의 동굴이다.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은, 그리고 그 사연이 서리의 기이한 역사와 맞닿아 있는 ‘미친 노아’와 그 딸을 추적하는 과정은 추리소설처럼 긴장감 있게 읽힌다.

‘그곳이 어디든’의 주인공은 ‘유’도, 산에서 돌집(실은 묘지)을 짓는 ‘미친 노아’도, ‘유’에게 서리의 비밀을 들려주는 ‘미친 노아’의 딸도 아니다. 바람이 사나운 개처럼 컹컹 짖어대고, 산봉우리에 갑자기 붉은빛이 감돌고, 포장된 길도 울퉁불퉁하고, 화난 것처럼 찌푸리고 말없는 걷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는 도시, ‘서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곳은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듯한 장소이지만, 서리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 이 비현실적인 도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공간과 그대로 겹쳐진다. 지난한 폭력과 사랑의 배신으로 깊은 상처가 난 곳. 서리가 어디든,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은 우리가 몸을 둔 지금 여기의 공간과 다르지 않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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