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구나, 애미야, 아니 해미 씨”(이순재)
여전한 교통체증, 서먹서먹한 친척들과의 만남, 그리고 전 냄새로 찌든 명절 증후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고통이 되어버린 민족의 대명절,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추석명절에 집안일 절대로 안할 것 같은 ‘OK해미’와 가족들과 고스톱 치다 말고 손자 방에 들어가 몰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 같은 ‘야동순재’가 만났다. 대화 주제는 한가위 스트레스에 ‘하이킥’ 날리기. 이들이 시아버지와 며느리 처지에서 한 이야기를 대화체로 구성했다.》
○ 박해미 “명절 연휴에 집안일 한번도 안해봤어요. 호호”
박해미(이하 박): 오호호∼ 아버님! 아니 선생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나저나 벌써 추석 연휴네. 시간도 참 빨라요. 하이킥 끝낸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순재(이하 이): 난 17일부터 방영되는 드라마 ‘이산’ 촬영 때문에 이번 연휴도 가족과 보내는 건 물 건너갔어. 추석 하루만 쉬는데 성묘하러 갈 수 있으려나. 해미도 바쁘죠?
박: 네, 솔직히 요즘은 하루하루 날짜 세는 게 두렵다니까요. 공연들은 다가오고 (연극 ‘스위니 토드’, MBC ‘쇼뮤지컬’) 연습은 부족한데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매일 수험생이 된 기분이랄까. 사실 이런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죠 뭐. 전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연휴에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이: 엥, 그게 정말이냐?
박: 네∼ 그럼요.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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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 그래도 너희 집안에 며느리는 너 하나라고 들었는데.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은 일 년에 하루뿐인데 좀 심한 거 아니야. 설마 송편도 한 번 안 빚어본 건 아니겠지?
박: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저 송편 한 번도 안 빚어 봤어요. 오죽했으면 아들이 일기장에 어린이집 선생님이 송편 빚는 그림을 그렸겠어요. 그래서 올해는 안 되겠다 싶어 송편을 한번 빚어보려고 해요.
이: 흠…. 하긴 요즘은 송편을 죄다 사 먹지. 추석이래 봤자 잠깐 모여 밥이나 후딱 먹고 가고 말이야. 우리야 뭐 이북에서 월남한 세대니까 명절 때면 사돈에 팔촌까지 30명 정도 모여서 왁자지껄 보낸단다. 그래도 서로 바쁘다고 얼굴도 안 비추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박: 물론 명절이 온 가족의 행사라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전 한 집안의 며느리이자 배우이기도 해요. 제게는 다양한 역할이 있고 이것들은 어쩔 수 없이 충돌하게 마련이죠. 제가 관객들에게 “전 명절 때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공연은 잠시 미루겠습니다” 할 순 없잖아요. 반면 가족에게는 이런 양해를 구하는 것이 크게 도의에 벗어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서로 아끼고 힘들 땐 배려해 주는 게 가족 아니겠어요. 제 말이 틀린가요?
이: 이럴 땐 대발이 아버지가 아니라 야동순재인 게 아쉽구먼.(웃음)
○ 이순재 “며느리 위해 송편 빚어주는 시아버지 돼야지”
박: 그나저나 아버님께서는 추석 때 집안일 좀 거드시나요? 송편은 잘 빚으세요?
이: 나야 뭐. 젊었을 때는 좀 빚어봤지. 근데 모양도 신통치 않고 옆구리는 터지고 마누라한테 자꾸 구박당하니 포기했어.
박: 아니, 그럼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송편 빚으면서 태어나나요. 그건 아니잖아요∼.
이: 대신에 남자들은 차례를 주도하지 않나. 하고 싶어도 남자들이 할 일이 없는 게 추석이더라고. 그렇다고 우리가 식혜를 담겠어. 어렸을 때 떡은 열심히 쳐 봤다만…. 힘 좀 쓰는 건 남자가 하고 음식 장만은 이제껏 해온 여자들이 주도하는 게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일 다 마쳐놓고 고스톱은 온 가족이 함께 치고 말이지. 얼마나 이상적인 명절 풍경이냐.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엔 제사를 없애자는 건데…. 해미도 혹시 그런 생각이에요?
박: 오∼노. 그건 아니라고 봐요. 조상을 모시는 거 전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간소화하자는 거죠. 특히 제사음식 말이에요. 좀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명절 때 버리는 음식 쓰레기 보면 걱정된다니까요. 허례허식에 갇혀 얼마나 많은 걸 낭비하고 있냐고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정리하면, 낭비는 줄이고 가족끼리 즐겁게 즐기는 추석이 되자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이: 어찌나 옳은 소리만 하는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추석 네 공연에 송편이라도 들고 찾아가야겠다. 끼니도 못 챙겨먹을 텐데 먹고 싶은 건 없어요?
박: 오케이∼ 물론이죠. 언제든 환영이에요. 이런 시아버지라면 전 언제든 오케이∼라니까요.
글=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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