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으로서는 로질리 시절을 단 1시간만이라도 다시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그의 앞에는 살아 숨 쉬는 구멍과도 같은 미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자아를 찾을 수도, 성공할 수도, 한 사람의 남자도 될 수 없을 듯한 이 막막함 속에서, 그 희망이 그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것은 소설 ‘혁명’의 주인공인 장 마로가 기억을 내림받아서다. 그는 고모할머니 카트린에게서 모리셔스 섬 로질리의 기억을 물려받고 있다. 모리셔스 섬은 마로 가문이 자리했던 곳이다. 작가 르 클레지오(67)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하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온 르 클레지오. 남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이 속한 곳은 조상들이 살아온 모리셔스 섬(프랑스령이었다가 독립)이라고 말하는 그다. ‘몸은 프랑스에, 그러나 정신은 모리셔스 섬에 둔’ 이 괴리감은 르 클레지오의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
‘혁명’은 르 클레지오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프랑스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장은 직접적으로 르 클레지오의 아버지가 모델이 됐지만, 뿌리와 정체성에 관해 오래도록 탐색해 온 르 클레지오의 초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소설을 통해 르 클레지오는 ‘나는 왜 문학을 하게 되었나’에 대해 고백한다.
“신은 모리셔스를 창조했다. 그 후에 천국을 만들었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할머니가 그려 보이는 모리셔스는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답다.
낙원 같은 모리셔스 섬과 교차되는 이야기는 조상인 장 외드 마로의 일기다. 그는 프랑스대혁명에 취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참가하지만 약탈과 기근 등 혁명에 따르는 잔혹함에 실망해 전역한 뒤 새로운 터전을 꿈꾸며 모리셔스 섬으로 향한다. 모리셔스 섬에 대한 꿈같고 나른한 묘사와 장 외드 마로가 겪는 혁명과 전쟁의 끔찍함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마로의 일기는 그 자체로 프랑스의 굴곡진 역사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가 갖고 있는 기억이, 그 기억의 상처가, 기억에 얽힌 역사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 세상에 흘려보낸다. 그 상처의 기록으로 인해 세계는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혁명’이다. 원제 ‘R´evolutions’(2003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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