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시인. 그러므로, 지극한 절망의 끝에서 가을을 본다. 저 산의 빛깔과 바람의 온도. 낙엽의 행진처럼 쓸쓸한 풍경들이 스스럼없이 고통으로 체험될 때, 가을은 더는 아름다움으로 찬사되지 않는다. 깡마른 풍경으로 사물들은 버려지고 몸이 또는 마음이 운신할 모든 길에 선언된 무효. 누구도 연결해 내지 못하는 전화선을 붙들고 애원해도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가을을 저 끔찍한 매독에 빗대게 만드는 것일까? 모든 날을 마비된 한쪽 다리로 저물어 버리게 만드는 삶의 정체를, 그러나 가을은 답하여 일러 주지 않는다. 다만, 이 징글징글한 삶과 정면으로 마주서게 만들 뿐. 정면으로 마주하여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절망하기 위하여’ 잠을 자게 만들 뿐(‘과거를 가진 사람들’). 도무지 어리둥절 풀 수 없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에 대해(‘이 시대의 사랑’), 가을은 흔한 답장 한 장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시집에게 묻는다. 우리가 모조리 가을에게 덮어씌우는 이 지독한 혐의에 대해.
시집의 30쪽을 펼치면 ‘서른 살’이라는 시가 나온다. ‘피는 젤리’처럼 굳고 ‘머리칼은 철사’처럼 뻗는 시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찾아온다고 말한 서른 살.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 왔거나 거쳐 갈,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이 하나씩은 옆구리에 차고 가는 고독이라는 주머니가 더는 낭만의 보석들로 빛나지도 추억의 가옥으로 따뜻하지도 않은 때. 뒤집힌 주머니처럼 발가벗은 삶이 그 통렬함으로 스스로를 비추는 때.
그때에 이르러 문득, 가을은 모든 수사를 버린다. 볕 아래 펼친 듯 너무도 명징하게 드러난 현실이 매독균처럼 우리의 혈관을 흘러 다니기 시작하는 것. 그때부터 가을은 ‘아주 잘 닦여진 거울’로 놓인 것이다. 거기에 대고 보면 우리는 ‘죽음 이상으로 투명해 보인다’(‘우우, 널 버리고 싶어’). 이 무서운 적나라함! 이제 통속의 거웃으로 치장하지 못하는 몸에게, 더는 비밀스러울 것도 없는 마음에게, 비로소 최승자의 시는 묻는다. 사랑은 안녕하니? ‘눈물의 단두대’ 앞에 선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에 시작한 치명적인 사랑’에게(‘슬픈 기쁜 생일’).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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