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3>세상에서 가장…

  • 입력 2007년 10월 12일 03시 03분


《소리가/나지 않는 몸을 빛이 문고리처럼 잡고 자꾸만 흔든다/그러나 거울의 허공은 몸의 기억을 켜는 법이 없어 나는/소리의 깊이가 되어간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 있는가’ 중에서》

지금도 나는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도의 클라이맥스가 여섯 살짜리 아이들의 기도 내용과 똑같다. “제발 오늘 밤도 무서운 꿈 안 꾸게 해주세요!”

수조 속의 물이 불어나 입으로 물이 들어온다든가, 들판을 달리던 중 늑대에게 물릴락 말락 하는 꿈은 최악이다. 몸이 훼손되는 순간을 상상하는 건 정말 두렵다. 그런데 사실 요즘 사람들치고 어떤 방식으로든 몸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이원도 몸에 예민한 시인 중 한 명이다. 이원이 본 바에 의하면 사람들의 몸엔 그리움이나 추억은 들어 있지 않고 ‘녹슨 삽 하나’, ‘한밤의 검고 불룩한 TV’가 들어 있다.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기존의 관념적인 요소들은 쏙 빠지고 즉물적이고 교환가치가 있는 상품들로 병치돼 몸을 누빈다.

게다가 이 몸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 질주한다. 질주하다 ‘거울 끝에 벽’을 만나고 결국은 ‘날계란처럼 터지’고 누구나 죽듯이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 놓고는, 시간이 어떻고, 죽어서 얼마나 불쌍한지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재미가 없다. 이원은 ‘울퉁불퉁한 시간을 짝짝이로 신고’ 쇼핑몰로 몰려가는 귀신들의 뒤를 따라간다. 소비하는 인간은 죽어서도 여전히 소비하기 때문에 귀신들은 쇼핑에 몰두한다.

‘고단백 눈알 통조림, 나비 2천 마리의 날개 분말 한 병, 사과처럼 머리꼭지를 사각사각 도려낼 수 있는 칼 세트, 발목을 잘라야 신을 수 있는 말굽 세트, 미로형으로 완성시키면 사방 7백 리의 숲을 걸을 수 있는 DIY 시간 팩, 5천년 묵은 뿌리를 대신할 5십년짜리 뿌리’(‘고스트월드’ 중에서)를 산다. 안고만 있어도 별에 가 닿는 눈알 통조림이라니, 물 없이 한 숟가락을 삼키면 동남쪽에 폭우를 몰고 오는 분말이라니, 너무나 짜릿하고 유쾌한 상상이다. 도대체 귀신들은 밤마다 어쩜 이렇게 재미있게 노는 걸까.

이원에게 삶은 꽃이면서 벼랑이고, 모니터이면서 거울이다. 인간은 시리얼 번호가 찍힌 전자제품 아니면 공산품, 모니터 뒤의 검은 그림자, 상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 아니 그냥 깨지기 쉬운 날계란이다. 이번 시집에는 죽음에 관한 진술이 여러 구절 보인다. ‘오해마라 잔인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내 몸이다 그래서 내 몸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나는 부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중에서) ‘죽음은 끝까지 관념이다… 관념을 벗은 몸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에 사람들은 먼저 제 죽음을 만난다.’(‘몸 밖에서 몸 안으로’ 중에서)

물신 사회의 최전선에서 문명의 온갖 달콤한 루머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몸, 문명의 온갖 테크놀로지가 통하고 잔류하는 몸, 문명의 쓰레기가 축적되어 결국 악취를 풍기고야 마는 몸을 우리도 하나씩 갖고 있다. 어쩌면 몸에 대한 천착, 몸에 관한 새로운 이미지 보여 주기야말로 오늘의 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앙가주망(현실 참여)이 아닐까 생각한다.

강영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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