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초, 한 사내가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언론은 이렇게 그의 부고를 알렸다.
서울대 법대 졸업…법조계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미8군에서 비행기표와 영어성경책 등을 판매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국내에 소개…1976년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하면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도입…1980년 신군부에 의해 ‘뿌리깊은 나무’가 강제 폐간된 뒤에는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국의 발견’과 ‘판소리 전집’을 간행하는 등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데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그의 이름은 한창기(1936∼1997). 여기 소개할 세 권의 책은 그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편집자였던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 김형윤(김형윤편집회사 대표) 설호정(풀무원 홍보이사) 씨가 한데 엮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오래된 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섬세하고 따스하다.
‘옛 무덤을 파고 문화유산을 찾는 것도 조상들의 얼을 찾는 일이긴 하겠지만 어디 우리의 얼이 그것뿐이랴. 농부의 쇠스랑이나 어느 할머니가 짚을 태우는 화로에도 얼은 있다. 한국의 얼은 짚신의 마디마디에도 엉겨 있고 갓끈의 매듭에서도 너울댄다. 장국밥의 터분한 맛 속에도 있고 새색시의 꽃비녀 끝에도 있다.’(1973년)
그의 글은 앉아서 쓴 것이 아니라 현장을 직접 찾아 사람들을 만나고 쓴 것이다. 그래서 더 정겹고 생생하다. 그의 발길은 벌교 오일장, 안동포, 한산 모시, 백자 가마, 옛집의 지붕, 마고자와 조끼 단추 등으로 종횡무진 이어진다.
‘벌교 장터로 가는 들목은 여섯 군데다.…어귀를 좀 들어서면 땜장이, 칼잡이, 신기료장수, 우산 고치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늘어 앉아 있다’로 시작되는 ‘시골의 오일장’(1977년). 저자의 시선은 기름 짜는 집, 싸전, 솥전, 건어물전, 포목전, 옹기전 등 북적거리는 장터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여기에 젓가락 두들기면서 술 따르고 노는 난봉꾼과 간이주점 작부 ‘미스 민’의 얘기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한바탕 장터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도 돋보인다. 외국어의 범람 속에서 우리말의 순수를 지키고자 했던 이야기, ‘있어서’와 ‘있어서의’의 차이나 ‘때문’과 ‘까닭’의 차이에 대한 얘기도 재미있다.
글 곳곳엔 한창기 삶의 담백함과 은근함이 배어 있다. 진지하고 아름답게 살고자 했던 한 문화인의 내면을 슬쩍 엿보는 일, 참 매력적이지 않은가.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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