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속 오두막 사립문 가에 우연히 나와 자란 산초나무에 새까만 열매들이 꽃보다도 예쁘게 여물어 반짝인다. 길가 쪽으로 휘어진, 가시가 많은 산초나무를 함부로 스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모르는 척 지나쳐서 팔뚝에 가시 긁힌 상처를 가져 보고 싶은 심사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살고 있는 프로스트의 이 소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는 소년이었다./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걱정이 많아지고/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한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자작나무’ 중에서)
조석으로 바람이 선득해지면 세상은 맑아지기 시작한다. 일러 가을이다. 청명한 하늘과 청명한 숲, 그 속에서 유난히 일찍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북나무나 벚나무의 잎들을 나는 어느 사상서적의 핵심 단락보다 더 깊이, 더 오래 되새겨 바라보고 싶다. 청명 속으로 나타나는 그 얼굴이 신의 그것이 아니겠는지 확신하면서. 그리고 또다시 의심하면서. 일찍이 그 질문의 선구자들 중에서 프로스트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기막힌 노인이었다.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그 떡잎은 꽃이지만,/한 시간이나 갈까./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새벽은 한낮이 된다.’(‘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떡잎의 연초록이 쉬 짙어져 제 빛을 잃는 것에서 ‘에덴’이 ‘슬픔’에 빠지는 것을 본다. 떡잎 속에서나 있을 수 있다는 낙원의 발견은 얼마나 아무렇지 않은 놀라움인가. 그렇듯 삶이 절망의 바다라는 것을 보다가도 ‘샘 치우는’ 단순한 행동을 통해 큰 지혜에 이르고자(이른다가 아니라!) 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내려고요/(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고 해요. 너무 어려서/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목장’)
샘에 가라앉은 나뭇잎이나 건져내는, 별것 아닌 행위 속에서도 잃어버린 낙원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 아슬아슬한 정신의 곡예가 바로 최대의 겸손이 아니겠는가.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괄호 속에 숨겨놓은 저 문장 속에서 내내 나는 나오고 싶지 않다.
눈 내린 겨울 아침 나는 지난 한해살이의 후회들을 들고 숲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까마귀가 주는 맑은 눈가루를 머리에 맞아야 조금은 나아질 테니까. 그때 산초나무 열매들 아직 있을까?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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