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대학 졸업식을 앞둔 한 여성이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새댁처럼 하루 종일 냄비 닦는 것을 낙으로 삼기 싫어서”였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세계적인 기업들에서 일했다. 2003년 삼성전자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현정(사진)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실 상무다. 그런 그가 ‘청개구리 기질’로 한국 사회와 한국 기업에 ‘쓴소리’를 했다.
이 책은 그가 외국 기업에서 겪은 일화로 시작한다. 만삭인 그에게 상사가 말했다. “만삭이라고 내가 잘 봐 줄 거라고 생각지 말아.” 그가 되받아친다. “뱃속 아이는 당신이 은퇴할 때쯤 경제를 짊어질 세대의 주역이 될 겁니다. 이 아이가 제대로 크지 못하면 당신 은퇴생활도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상사가 답한다. “당신 강단 있다. 그래서 당신을 신뢰한다.”
한국 기업의 위계질서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한국에 살면서 외국의 이런 경험이 그리웠다고 말한다. 그가 굳이 개인적 경험을 책 앞에 소개한 것은 이 경험이 그의 한국 사회, 기업 비판의 맥락과 긴밀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을 꿰뚫는 핵심은 한국인, 한국 사회가 이제 ‘근면성의 DNA’로 이뤄낸 제조업 신화를 넘어 ‘창조성의 DNA’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
그가 바라보는 한류 대표 문화 상품 비보이 문화는 어떨까. 뜻밖에도 한국의 비보이는 창조성 DNA보다는 근면성 DNA에 가깝다. 한국 비보이는 죽기 살기로 피땀 흘리는 ‘한강의 기적’ 방식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사회는 양파 껍질 하나만 벗기면 농경사회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으로 뭉쳐 있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집단 공동체 의식과 수직적 위계질서 안에서 획일적 가치관으로 결속을 요구하고 근면성이 최고라고 믿는다.
포장만 국제화된 엘리트에 대한 비판도 따갑다. 그는 10분만이라도 “나와 다른 역사, 다른 관습,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자라났고 살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연성을 기를 것”을 주문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은 세계를 모른다. 미국인도 다른 나라를 잘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은 빗장 걸어 잠가도 한동안 문제없지만 우리는 단 하루도 문을 닫으면 살 수 없다. 미국인들이 세계를 모르는 것은 애교지만 우리가 세계를 모르는 것은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 말한다.
간간이 출간되는 ‘외국인의 한국 비판’을 다룬 책은 독설이나 냉소로 인해 부담스럽다. 하지만 저자의 쓴소리는 다르다. 한국인이자 국제인인 그의 비판은 따뜻하고 공감이 간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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