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오자에 목 맨 편집자여,불량번역 솎아 낼 시간이오

  • 입력 2007년 10월 20일 03시 09분


최근 인문교양 출판사 프로네시스의 김정민 대표와 편집자는 넘겨받은 번역 원고를 살펴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독일의 문화사에 관한 독일어 책이었는데 번역 문장이 좀 투박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번역자에게 연락을 했다.

“전체적으로 우리말 문장이 투박해 독자들이 읽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러자 독일철학을 전공한 40대 중반의 그 번역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문서 번역에 있어 중요한 점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원서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문장이 투박한 것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김 대표와 편집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 출간된 번역서를 볼 때 많은 사람은 우리말 문장이 유려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먼저 살펴본다. 원문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됐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적다. 하기야 원본을 구해 대조해 보지 않는 한, 번역이 정확한지 따져 본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번역자가 해석하기 애매한 문장을 임의로 누락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원문의 의미는 소홀히 하고 우리말 문장 다듬기에만 과도하게 집착해 원래의 뜻을 왜곡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런 사례는 적지 않다.

이것을 짚어 줄 사람은 다름 아닌 출판사의 편집자다. 번역 원고가 들어오면 원서와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누락된 문장이 없는지, 과도하게 윤색된 대목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한다.

그러나 그런 편집자가 절대 부족한 것이 우리 출판계의 현실이다. 교정 교열만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불량 번역을 걸러 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수년 전 우리말로 번역되어 밀리언셀러가 된 인기 팩션이 있다. 세계적으로 3000만 부 이상 팔려 나간 이 팩션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팩션은 오역의 불명예를 겪어야 했다. 한 대학 영문과 교수의 따끔한 오역 지적에 출판사 편집자가 사과했을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소설이지만 역사 종교 미술 분야의 전문 용어에 라틴어가 등장해 쉽지 않은 번역이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편집자가 번역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한 책임도 크다.

한국출판인회의가 다음 달에 편집교정능력검정시험을 실시한다. 국내 최초의 편집검정시험이다. 이 시험을 통해 현역 편집자들과 예비 편집자들의 우리말 실력과 교정 편집 능력을 점검해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현직 편집자들이 이 부문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검정시험 시행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교정 교열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꼼꼼함과 사명감으로 불량 번역을 걸러낼 수 있는 방법과 의지를 고양해야 한다. 요즘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기획이 좋은 대접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편집자로서의 근본적인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많다. 불량 번역서가 난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본을 되돌아봐야 할 때다.

이광표 기자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