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모체의 자궁을 잡아당기며, 또 다른 어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조른다. ‘나의 아궁이가 차가워 아기는 죽음처럼 졸기만 하네. 어머니의 술을 딱 석 잔만 얻어먹으면, 내 아궁이에도 불길이 치솟을까. 뱃속의 너도 내게 무언가를 보았니? 내 어머니 몸속에서 자라던 버섯 같은 걸 말이야.’”(‘나무구멍’ 중에서)
‘여성’과 ‘몸’은 한국 문학의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남성에 비해, 정신에 비해 경시됐던 이 키워드들은 거대담론 뒤에 가려졌던 것에 대한 상징으로 조명받았다. 젊은 작가 김지현(32) 씨는 이 두 키워드를 이어서 집요하게 몰아붙인다.
등단작 ‘사각거울’로 주목을 받았지만 첫 소설집을 묶은 지 5년 만이다. 2, 3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내는 요즘 풍토를 생각하면 더딘 편이지만, 작품들에서 시간에 휘둘린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김 씨가 출발했던 ‘여성의 몸’이라는 주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고 선명해지는 쪽이다.
‘멧돼지 이야기’에서 무섭도록 강한 여성성은 ‘몸’과 직접적으로 만난다. 멧돼지를 떠올리게 하는 여성 L이 오래 묵은 간장으로 식당을 찾아오는 유약한 남성을 열정과 폭력에 휩싸이게 한다는 이 단편은, ‘여성’ 하면 떠올리는 자애로운 모습이라든지 육체의 부드러운 곡선 같은 선입관을 확실하게 무너뜨린다. L의 몸은 비대하고, 다리는 터무니없이 가늘고 짧으며 귀는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다. L의 몸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분명 모성적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모성의 이미지를 유순한 집동물인 돼지가 아니라 공격적인 멧돼지로 치환함으로써, 관습을 배반한다. 작가는 이뿐 아니라 ‘온몸에 굵은 털이 나는 여자’(단편 ‘털’) 같은, 지극히 환상적인 몸을 통해 여성성의 강렬함을 부각시킨다.
‘사랑하는 두 여자,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소설을 쓴다는 김지현 씨. 평론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맑은 육체가 아니라 노린내 피우는 육체에서 모종의 잠재력이랄까, 에너지를 발견한다”며 “신인의 등장에 촉각을 세운다”고 호평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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