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9>달의 이마에는…

  • 입력 2007년 10월 22일 03시 05분


《일단 밖으로 나와야 집안 사정도 안다. 안 나오면 집안 사정이랄 것도 없다. 수신제가니, 부모봉양이니 물에 빠져 입만 남은 것들의 짓거리. 일단 바깥으로 나오면 바깥일도 집안일이다.

―‘일단 나와 봐야 안다’ 중에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 뉘로부터 유래했는지 알면 가 따져 묻고 싶다. 왜 하필 콕 집어 가을이었느냐고. 독서의 계절은 숨 쉬는 족족이어요, 뉘라도 그리하였더라면 말 잘 듣는 착한 우리들 책 팔고 사고 읽는 재미 지금보다 훨씬 쏠쏠도 하였으련만, 내 식대로 말하자면 가을은 ‘일단 밖으로 나와야’ 하는 계절이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말은 또 얼마나 살쪘는지 ‘속속들이 내부를 알고 있는 네 방에서’ 일단 나와 봐야 아는 계절이다.

해서 나는 이 가을, 책을 집어 던지고 대신 그 손으로 테니스 라켓을 집어 든 채 내 방에서 일단 나와 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개인 교습을 신청한 지 며칠 뒤 첫 수업에 운동화 끈 단단히 조여 매고 집을 나서는데 어럽쇼, 이거 가을비였다. 김 팍 새서 풀 죽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쉬운 러닝도 머신도 다 놔두고 왜 하필 테니스였나 싶었다. 그때 시인 이성복이 생각났다. ‘시가 안 될 땐 내 시에서 나와 테니스를 쳤다’니까 나도 따라 그랬나.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이성복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은 형식이 좀 별나다. 시인이 외국시를 읽다가 ‘아 왔구나’ 하는 그 감(感)을 매개로 발화된 시편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술잔을 입에 대면서 내 그대를 쳐다보고 한숨짓는다’라는 예이츠의 시 한 토막을 수렴하여 이성복은 이렇게 발산한다. ‘사랑은 어떻든 견디기 힘든 것, 소련의 브레즈네프가 환영 나온 차우셰스쿠를 포옹하듯 서로 딴 방향을 바라보는 것. 부둥켜안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어떻든 견디기 힘드는 것’ 중에서). 이를 두고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시라 하면 시인이 상스럽다 버럭 그러실까, 음 난 좋기만 한데….

해서 나는 이 가을, 다시금 그의 시집을 펼친다. 이 문장 너머 저 문장 아래 연필로 흐릿하게 밑줄 긋고는 느낌표 쾅! 밀어 넣던 망치질의 흔적, 그 행복한 항복의 순간이 참으로 여럿이었다. ‘이 새낀 때릴 데가 없네’라는 구절 아래 내가 패러디한 한 구절이 눈에 띈다. ‘이 시는 버릴 데가 없네’… 그래, 이 마음이야말로 숨길 수 없는 질투겠지. 한 사물이 시의 어떤 발상으로 새롭게 포착될 때 그는 촘촘히 거미줄을 치고 숨죽여 기다리는 한 마리의 거미를 닮았다. 매운 만큼 정교한 바느질 솜씨로 침묵 속에 한복을 짓는 침선장(針線匠), 그도 제격이다. 가만있어 보자, 이거 모두 나와의 비교에서 비롯됨이네. 시가 안 될 땐 내 시에서 나와 남의 시나 읽으라던 이성복 시인의 말을 따라도 내가 너무 따랐나.

11월에 시집을 가는 막내 동생이 막바지 정 떼기로 엄마와 하루하루 싸움이다. 노처녀 큰언니인 나는 마주한 채 참견은 주제넘고 해서 문자나 넣는다. ‘일단 밖으로 나와야 집안 사정도 안다’ ‘뭔 소리여’ ‘시여’ ‘그니까 뭔 말이냐고’ ‘효도하라고 이것아’ ‘웃겨, 언니나 좀 잘하시지’ 아, 맞다. 그래 나는 나나 잘해야 한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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