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4년 영국군은 뉴암스테르담을 공격했다. 니커보커들은 목책(wall)을 세우고 저항했지만, 도시는 함락됐다. 이름도 뉴욕으로 바뀌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가’는 당시의 목책에서 유래됐다.
1907년 니커보커는 월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예금 인출 사태(뱅크 런)가 미국 전역으로 번지면서 ‘1907년 패닉(금융공황)’이 촉발된 것이다.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소유주인 F A 하인스와 찰스 바니 사장이 구리 값을 올려 수익을 얻기 위해 무리하게 구리회사 인수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이 계기였다. 미국 상업은행이 니커보커 트러스트의 수표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자, 10월 22일 이 회사에는 돈을 찾기 위한 예금자가 장사진을 쳤다. 예금인출 사태는 전국으로 번졌다. 바니 사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레드릭 미시킨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저서 ‘화폐와 금융’에서 “19세기와 20세기 은행 공황은 20여 년마다 되풀이되는 정기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예금인출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도 없었다.
뉴욕의 은행가를 설득해 바짝 마른 자금줄을 풀게 하고 사태를 진정시킨 이는 금융 자본가 J P 모건이었다. 중앙은행 역할을 한 셈이다. 그가 사망한 1913년 중앙은행 격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설립됐다.
“모기지 대출 금융기관들이 최근 수개월 동안 폐업하거나 사업을 줄이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상황은 100년 전인 1907년 은행 위기와 비슷하다.”(리먼브러더스 전략책임자 잭 멀비)
올해 8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불거지자 ‘1907년 금융 공황’이 다시 세간에 오르내렸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인간의 탐욕은 여전하고,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은 더 넓어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의 탐욕과 금융시스템의 허점이 존재하는 한 ‘패닉’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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