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연기는 말로 못하는 것 보여준 것일뿐” 탕웨이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감독, 리안이 올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색, 계(色, 戒)’의 개봉(11월 8일)을 앞두고 주연 여배우 탕웨이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대만 출신인 그는 ‘결혼피로연’(1993년)과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1996년)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와호장룡’(2000년)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으며 ‘브로크백 마운틴’(2005년)으로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세계적 거장이다. 미스 베이징 출신의 탕웨이는 이번이 첫 영화 출연.》
뒤늦은 수상 소감을 묻자 리 감독은 “베니스 수상 전 미국에서 영화가 NC-17등급(17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아 걱정을 많이 했지만 수상으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돼 기뻤다”고 말했다.
‘색, 계’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 상하이 친일파의 대표세력 이(량차오웨이) 대장과 그를 제거하려는 스파이 왕치아즈(탕웨이)가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비극으로 둘의 격정적인 정사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다. 중국에서는 10분가량 삭제된 채 상영됐지만 한국에선 청소년 관람 불가로 무삭제 개봉된다.
리 감독은 “내가 중년의 위기에 빠졌는지(웃음) 실제로는 보수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지만 중년이 되니 젊었을 때 표현해 보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며 “중국에서 (삭제된 채) 상영된 것만으로도 다른 감독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정사 장면의 동작 하나하나를 배우들에게 일일이 지도했다고. 그는 영화 속의 희한한 체위를 언급하자 “실제 생활에서 내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며 웃었다.
시사회 이후 기자들의 화제는 “과연 한국 여배우 가운데 누가 저 정도 정사 장면을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전라 연기를 펼친 탕웨이는 “두 주인공은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표현했던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연기가 이미지에 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자기 직업에 모든 것을 걸고 몰입해 즐기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죠. ‘이 부분은 조금 속여도 되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관객들은 큰 스크린을 통해 그런 걸 다 알아챈답니다.”
이렇게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는 탕웨이도 리 감독에겐 혀를 내둘렀다. 스스로 ‘아시아 제일의 예술학부’라고 설명한 베이징중앙연극학원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탕웨이는 “감독님은 너무나 요구사항이 까다로워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배우들에게도 다 그러더라”며 “단 1초도 영화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는 리 감독을 보니 나는 감독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리 감독 외에는 최근 타계한 스웨덴의 잉마르 베리만을 존경한다며 현대인들은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순간에 대처하면서 살아가지만 베리만의 영화를 보면 인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리 감독은 이번 영화를 찍으며 촬영 현장에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캐릭터들이 모두 자신의 분신 같아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고민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고. 우는 그에게 량차오웨이가 다가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분신이 많은 당신을 동정한다”며 위로했다. “광위민(왕치아즈를 스파이로 만드는 항일운동가)은 소극적인 제 평소 모습과 비슷합니다. 제 영화를 통해서는 왕치아즈처럼 열정적인 모습이 보일 테고, 현장에서는 량차오웨이가 연기한 이 대장처럼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지시를 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졌기 때문일까. 리 감독은 “인간 본연의 모습, 숨겨진 모습을 탐구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며 “이번 영화는 억압된 자아를 반영하려다 보니 선정적으로 보이지만 다음에는 성적인 것을 즐길 수 있는 코미디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 영화 ‘색, 계’는
‘색, 계’는 중국의 여류 소설가 장아이링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탄탄한 원작에 거장 리안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시사회 다음 날부터 인터넷의 화제는 ‘배우들의 어디 어디가 보인다’ ‘정사 장면이 실제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정말 ‘지독하게’ 찍었다.
량차오웨이와 탕웨이는 일반 상업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갖가지 체위를 구사하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 ‘기름기를 쪽쪽 빨아먹겠다는 듯’ 달려드는 격렬하고도 사실적인 섹스신을 만들었다. 객석까지 그들의 땀 냄새가 확 풍겨오는 듯하다. 그러나 보고 나면 “리안이 왜 이렇게까지 찍어야 했나”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사 장면은 오히려 슬프다. 아무도 믿지 않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남자와 그를 믿게 만들어야 하는 여자의 동물적인 섹스, 생존을 위한 처절한 극한의 몸짓이다. 일부러 서로를 고통스럽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섹스는 ‘색(色·욕망)’과 ‘계(戒·신중)’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하는 그들의 내면을 보여준다.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장르를 만들면서도 항상 인간의 내면과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데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는 리안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됐다.
배우들은 이 영화에서 눈빛으로 말한다. 초반에 량차오웨이는 그 특유의 우수에 찬 눈빛 속에 상대를 관찰 혹은 관조하는 듯한 분위기를 품고, 탕웨이는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유혹적인 눈빛을 ‘연기’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둘의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허물어진다. 둘 다 ‘색’을 ‘계’ 했지만 ‘색’에 무너지고 만다.
157분의 러닝타임을 겁내지 말 것. 지루하지 않다. 1940년대 홍콩과 상하이의 이국적인 풍경, 비극적인 멜로에 스파이 영화로서의 긴장감까지. 리안은 이 모든 것을 아주 고급스럽게 엮어 놓았다. 마지막 장면의 공허함은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놓는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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