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갤러리 투어, 윤택한 삶의 필요충분조건

  • 입력 2007년 11월 2일 03시 03분


《문화생활을 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히트했다는 뮤지컬, 유명 오케스트라의 클래식 공연….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몇 천원으로 고급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미술관과 갤러리다. 문화의 향기가 그득한 미술관과 갤러리는 열려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 곳에서 전시된 그림이나 조각 등만을 본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요즘 갤러리에서는 클래식 연주와 라이브 공연, 행위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아이들과 함께, 또는 연인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산책길도 가까이에 있다.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지친 다리를 쉴 수도 있다.

이번 주말 별다른 약속이 없다면 갤러리와 미술관 투어는 어떨까. 문외한이어도 상관없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음을 편안하고 풍성하게 해주는 예술의 세계가 열린다.▶dongA.com에 동영상》

○ 관객과 통하다

지난달 9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 ‘원앤제이갤러리’의 전시회 오프닝 행사.

DJ가 댄스 음악을 틀자 정원 벤치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높아졌다. 이날 행사는 밤 12시까지 계속됐다. 갤러리에서 전시 작품이 바뀔 때 하는 오프닝 파티는 작가들이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간단한 다과를 하는 게 관행이었음을 감안하면 DJ가 등장한 이날 행사는 파격적이었다.

원앤제이갤러리 박원재 대표는 “갤러리가 그림 수집가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즐기는 공간이란 걸 알려 주고 싶어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전시된 작품으로만 관객과 소통하던 갤러리들이 소통 채널을 다양화하고 있다.

종로구 가회동 ‘갤러리 스케이프’는 8월 오프닝 파티 때 인디밴드를 초청했다. 종로구 소격동 ‘갤러리 예맥’은 내년 2월 오프닝 행사 때 가수 한영애를 초대할 계획이다.

한국미술경영연구소 김윤섭 소장은 “오프닝 행사가 전시의 보조 행사에 머무르지 않고 독립된 기획 행사로 진행되는 게 요즘 추세”라며 “관람객과 소통하기 위한 갤러리의 노력”이라고 말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강좌를 열거나 음악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곳도 있다.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 ‘인터아트 채널’(02-736-2401)은 테이블 세팅법, 다과상 내는 법, 다기 다루는 법, 꽃꽂이 하는 법 등을 주제로 강좌를 열고 있다.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02-720-0667)에서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있고,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02-2014-6900)에서는 둘째 주와 넷째 주 목요일에 목요음악회를 연다.


▲ 촬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 문턱 낮춘 갤러리

청와대 근처인 종로구 부암동 길가에는 특이한 갤러리가 있다. 12m²(약 4평) 남짓한 크기에 여러 개의 작품이 전시돼 있지만 지키는 사람은 없다. 문도 밤 12시까지 열어 둔다. 더 많은 사람이 와서 보라는 뜻이다.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란 이름은 이 갤러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동네 주민들이 산책하다가 들렀으면 하는 마음에서 갤러리를 만들었는데 좁은 공간에 사람이 있으면 선뜻 들어오지 못할까봐 무인 갤러리로 운영한다”고 갤러리 주인 이승희 씨는 설명했다.

관람객들이 주저하지 않고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춘 것이 요즘 개관한 갤러리들의 특징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문을 연 ‘오페라갤러리’는 건물의 두 면이 통유리로 돼 있어 안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대부분 갤러리는 작품 보존과 감상을 위해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지어졌다.

오페라갤러리 김영애 책임큐레이터는 “우리나라 갤러리는 외양부터 위압적이어서 ‘살 것도 아닌데 들어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며 “미술이 먼 데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전면을 유리로 해서 안이 보이게 했다”고 말했다.

글=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사진=박영대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촬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음악회-공연에 쉼터까지… ‘복합문화공간’ 변신

그곳에 가면 오감이 즐겁다

청담동에 있는 ‘서미앤투스’는 ‘가깝고 친근한 장소로 느껴지는 갤러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가구도 전시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1000만 원이 넘는 앤티크 가구에 앉아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호사를 맛 볼 수 있다.

서미앤투스 박필재 경영지원실장은 “뉴욕에 가보면 주말에는 갤러리가 사람들로 꽉 차는데 한국에선 갤러리와 일반인 사이에 벽이 있는 것 같다”며 “유모차를 밀고 들어올 수 있는 편안한 갤러리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 에너지 충전소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씨는 아침 출근길에 갤러리를 들른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사는 김 씨는 인근에 있는 ‘국제 갤러리’와 ‘갤러리 현대’ 등을 둘러본 뒤 회사로 출근한다. 미술 작품 관람은 학창 시절부터 계속돼 온 그의 오랜 취미 생활이다. 김 씨는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에는 예술가들의 창작 에너지가 응축돼 있다”며 “내가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으면서 다른 예술가들의 에너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탤런트 유준상 씨도 틈만 나면 부인 홍은희 씨와 함께 갤러리를 찾는다. 유 씨는 “미술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상상력이 생기고,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스쿠터 마니아로 유명한 영화감독 이준익 씨도 촬영이 없는 주말이면 ‘눈을 씻어 주기 위해’ 스쿠터를 타고 갤러리 투어를 한다.

한 달에 2번 정도 가족과 갤러리 나들이를 한다는 회사원 김세원(39) 씨는 “갤러리를 다니면서 가족들과 대화의 소재가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 미술작품 100배 즐기기

전시 작품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많이 둘러보고, 오래 보는 게 최선이다. 작품을 처음 봤을 때와 두세 번 봤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선뜻 말붙이기가 쉽지 않더라도 큐레이터들에게 적극적으로 물어보면 좋다. 왜 이런 재료를 선택했는지,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 하나씩 질문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술을 보는 안목과 즐거움이 생긴다.

갤러리에서는 작품 가격을 묻는 것이 실례가 아니다.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은 판매를 목적으로 전시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큐레이터에게 자연스럽게 물어 보면 된다.

갤러리와 미술관이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전시 작품을 전시만 하느냐, 판매도 하느냐에 있다. 전시만 하면 미술관, 판매도 하면 갤러리다. 갤러리는 판매를 목적으로 전시를 하기 때문에 관람료나 입장료가 없다. 미술관은 입장료를 받는다.

미술관에서는 시간을 정해 놓고 작품을 설명해 주는 도슨트(docent·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 투어가 있는데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초보자들이 그림과 친해지는 지름길이다. 현대미술연구소 ‘사무소(SAMUSO)’ 유승민 큐레이터는 “미술과 친해지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그 뒤에는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영화를 빠짐없이 보듯이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회를 찾아다니게 된다”고 말했다.

자녀와 함께 관람한다면 작품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설명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이것저것 설명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아이의 감수성과 창의력을 죽이는 것이라고 큐레이터들은 지적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다면 매달 발간되는 ‘서울 아트가이드(www.daljin.com)’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전시 관련 각종 정보가 담겨 있는 서울 아트가이드는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무료로 배포된다.

오페라갤러리 김영애 책임큐레이터는 “관심 가는 작품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그 작품에 대해 찾아보는 등 하나씩 노력하다 보면 안목도 늘게 된다”고 말했다.

○ 갤러리의 낯선 풍경

“이건 얼마나 하죠?”

“호당 20만 원입니다.”

“이건 대략 20호 정도 되나. 많이 비싸지는 않네.”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간동의 한 갤러리에서 중년 여성 관람객과 큐레이터 사이에 오간 대화다. ‘호’는 미술 작품에서 그림 가격을 산정하는 기준이 되는 크기다. 통상 1호는 관제엽서 크기 정도인 가로 200mm, 세로 160mm다. 보통 1호에서 400호까지 있다. 호의 크기는 인물화냐 풍경화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6호는 1호가 늘어나면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20∼30mm씩 늘어난다. 최근 미술 작품이 재테크 수단으로 각광받으면서 갤러리에 작품 가격에 관심이 많은 관람객이 부쩍 늘었다. 이런 관람객은 대부분 미술품 투자에 앞서 갤러리를 학습장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큐레이터에게 그림 가격을 물은 중년 여성은 “그림을 한 번 사볼까 하고 친구들과 같이 다니고 있다”며 “문화생활도 하고 투자 공부도 되고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사간동 갤러리의 한 큐레이터는 “미술 작품 경매가 화제가 되면서 생긴 새로운 풍경”이라고 말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 촬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색깔 다른 갤러리… 취향따라 3色투어

갤러리가 밀집해 있는 곳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과 북촌 일대, 서울 강남구 청담동이다. 인사동에는 80여 곳의 갤러리가 골목 구석구석에 들어차 있고, 경복궁 인근 사간동과 팔판동 등을 아우르는 북촌 일대에도 50여 곳의 갤러리가 있다. 청담동 갤러리도 40곳이 넘는다. 지역마다 갤러리의 특성과 주변 환경이 달라 관람법도 달리 하는 게 좋다.


▲ 촬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북촌▼

은행잎이 노랗게 익어가는 경복궁 길을 따라 가볼 만한 갤러리와 미술관이 죽 늘어서 있다. 갤러리와 갤러리 사이의 간격이 인사동보다는 멀지만 갤러리를 찾아가는 길이 운치가 있다.

갤러리현대(02-734-6111), 금호미술관(02-720-5114), 아트선재센터(02-733-8945), 갤러리 예맥(02-720-9912), 학고재(02-720-1524), 몽인아트센터(02-736-1447), 국제갤러리(02-735-8449), 공근혜 갤러리(02-738-7776), 트렁크 갤러리(02-3210-1233), 원앤제이갤러리(02-745-1644) 등 갤러리를 도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금호미술관, 몽인아트센터, 국제갤러리(02-735-8449) 등은 카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어 아픈 다리를 쉬어갈 수 있다. 이곳에서 전시되는 작품은 인사동에 비해 대중성이 약하지만 현대 한국 미술의 주류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트렁크 갤러리 박영숙 대표는 “이 시대 대한민국의 시각 언어를 생산하는 지역이 북촌”이라고 설명한다.


▼청담동▼

유행에 민감한 동네 분위기를 반영하듯 감각적인 갤러리가 많다. 뉴미디어 아트부터 보석, 가구 등 전시 작품도 다양하다. 관람객이 들어가면 아래위로 훑어보는 큐레이터들이 있어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 한다. ‘비트폼(02-516-5383)’은 비디오, 디지털 카메라 등 뉴미디어 작품을 볼 수 있는 갤러리다. 뉴욕 첼시에 있는 세계적인 뉴미디어 아트 갤러리 ‘비트폼’의 한국 지점이다. 도록 대신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통해 작가들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오페라갤러리(02-3446-0070)’는 피카소, 샤갈 등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화가들의 미술 작품을 무료로 볼 수 있다. 1층에 따로 마련된 ‘블랙룸’에서는 소파에 앉아서 편안하게 작품 감상을 하고, 제품 구입 문의를 할 수 있다.

‘갤러리 더 스페이스(02-514-2226)’는 청담동에서 보기 드문 미디어 아트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미술, 음악회, 패션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도 선보이고 있다.


▼인사동▼

일반인들이 부담 없이 관람하기에 적합하다.

처음 갤러리를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큐레이터들이 문외한에게도 대체로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전시 작품도 회화에서 사진, 공예품, 고가구 등으로 다양하다. 좁은 지역에 갤러리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다리품을 덜 팔고 많은 갤러리를 돌아보기 좋다.

목인갤러리(02-722-5055)는 큐레이터들이 꼽는 이 지역 ‘추천 1순위’ 갤러리다. 일반 전시실 외에 2층에 목조각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옥상에는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인사아트센터(02-736-1020)는 인사동에서 전시회가 가장 많이 열리는 곳이다. 규모가 큰 전시가 자주 열리고, 관람 환경도 좋은 편이다.

5층 테라스에선 인사동 골목길을 내려다 보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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